이근문(李根淡)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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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 문(李根淡) (1840년∼1931년)
 
* : 백파(白坡)
* 호 : 문참(文參
)
* 출생지 : 김제시 백산면 돌제마을


선생의 이름은 근문(根流)이요, 자는 문참(文參)이니, 백파(白坡)는 자호이다. 신평 이씨(新平 李氏)로 그의 시조는 고려조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 공으로 이름은 덕명(德明)이다. 조선조에도 이조판서인 상원(上垣)과 부제학으로 시호가 문정공인 가종(可種)과 평택현감을 역임한 형수(亨樹)는 그의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이름은 화숙이요, 조부의 이름은 항순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대연으로 비(鈗)는 순흥 안씨인 장현의 딸이다. 서기 1846년에 김제시 백산면 돌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 뭇 아이들과는 어울려 유희치 아니하였으며 부모와 스승의 교훈에 따르더니 성장하여서는 그 당시 문장이 거벽이라 소문이 자자하였다. 창산(昌山) 성기운씨가 쓴 서문을 보면 매천 황현, 석정 이 정직, 운정 최보열씨 등과는 거의 비슷한 나이로 자주 왕래하여 남달리 두터운 정을 나누었고 시문을 논하였다고 쓰여 있다. 선생은 부친상을 당하여 정음삼년(停吟三年)을 하고 매일 새벽이면 성묘를 하되 풍우를 가리지 아니 하니 묘전에 잔디가 밟혀 흠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임오군란에는 지리산으로 이사를 하여 몸소 나무하고 나물 캐며 불고원정하고 식량을 구하며 편모를 봉양하니 향인 들이 참으로 효자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모친상을 당하니 상례를 부친상과 같이 하였다. 생계(生計)가 청빈하여 숙사(塾師)가 되어 자급(自給)한지가 여러 해 이나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석제리(石堤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가숙(家塾)을 설립하고 집안의 자질(子姪)들 교육을 위해 쉬지 않고 학문에 힘쓰니 소문을 들은 학자들이 많이 모였다. 경술년(庚戌年) 한일합방의 흉보(凶報)를 듣고 실성통곡을 하였으며, 고종황제의 국상(國喪)에도 부모상과 같이 애통하며 초야(草野)에서 검적(劒遊)하였다. 일찍이 처상을 당했을 때에 선생과 그의 아들들이 심하게 애통하여 안색이 초췌한 것을 보고 선생의 친구들이 술을 가져와 권하니 선생이 정색(正色)을 하고 거절하며 사람의 된 도리에 초상(初喪)을 당할시에는 죽을 먹어야 하는 것이요, 차마 밥도 먹을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술까지 마실 수 있느냐 하였다. 회갑 날의 축원(祝願)에도 끝내 거절하였다. 향년 86세인 1931년에 졸(卒)하니 김제시 백산면 황경동 선영(先瑩)하에 장사지냈다. 배우(配偶)는 전주 최씨로 붕현(鵬顯)의 딸이니 선생과 동갑인 병오생(丙午生)이나 선생보다 22년 앞선 1909년 을유년에 졸(卒)하니 묘는 선생의 묘와 합장하였다. 유고 집은 서예를 하고 있는 증손인 석부(錫富)가 잘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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