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남(李圭南)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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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로 살다 간 선비 이 규 남(李圭南) (1848년∼1913년)
 
* 초 명 : 규석
* 자 : 사극

* 호 : 소제

* 출생지 : 김제시 금구면 동천리


선생은 경주 이씨 재사당공락 예조좌랑 원의 12세 손이며,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한 취유헌(醉柳軒) 익성의 9세 손이고, 정유재란 때 부안 호치고개에서 왜장 평의 석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던 돈제 림의 8세 손으로서 아버지 행원당 홍영과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에서 난 2남 중 장남으로 1848년(헌종 14년)에 김제시 금구면 동천 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충절을 면면이 이어 온 이름 있는 집안의 후예답게 어려서부터 품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남달리 총명하였는데, 일찍이 문장과 문필이 능한 아버지 밑에서 사서오경과 주역, 당사 등 제자백가서를 두루 익히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덕행을 다지는데 힘써 언(言), 충(忠),신(信), 행(行), 독(篤), 경(敬)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문장(文章), 시(詩), 서도(書道)가 남보다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와 화사(華詞)의 착점(錯點)을 가려서 밝히는 등 여러 학문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졌는데, 특히 「금람(錦濫)」,「동아(東雅)」,「아보(雅譜)」, 라 이름 붙여진 시집(詩集)은 명문(名文)이요, 명필로 알려졌으며, 「유연견남산시」와 「열정시」, 그리고 「송시」 등의 필법은 가히 필한 여류의 명필 체이며 시부(詩賦)는 역시 명시로 꼽힌다. 이렇듯 일찍이 어린 나이에 일찍이 선비로 추앙된 선생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서 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언제나 학문을 가까이 하는 선비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농부로 살 것을 고집하고 그렇게 실행하였다. 그리고서 많은 벗들과 사귀며 글과 글씨를 벗삼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오로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친척간에 우애하며,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등 사람의 도리를 다하자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여 따랐다. 선생은 능성 주재룡의 따님과 결혼하여 4남을 두었는데, 글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문인이 많고 행위가 바르기로 이름났던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이 곳에서 1913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남 종담의 넷째 아들인 이태 술이 선생의 유집(遺集)인 시집과 서첩(書帖) 등 여러 가지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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