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섭(宋鏞燮)

  • 관리자
  • 2019.01.08
  • 2011
천재학자 송 용 섭(宋鏞燮) (1879년 -1964년)
 
* : 봉립(奉立)
* 호 : 어사(漁沙)
* 출생지: 김제시 봉남면 등룡리
 선생은 서기 1879년(高宗 十六年 已卯)에 김제시 봉남면 등룡리(金堤市 鳳南面 登龍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이름은 용섭(鏞燮)이요, 자는 봉립(奉立)이며, 호는 어사(漁沙)로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다.
14세쯤 되었을 때 벌써 그 뛰어난 재질이 고을에 널리 알려져 당시 고을에서 한명꼴로 천재(天才)를 모아 나라의 신진동량(新進棟梁)을 양성할 목적으로 경학관생(警學館生) 모집이 있었는데, 그 때 김명수(金明洙) 금구현령(金溝懸令)이 어린 어사를 추천하였으나 너무나도 어린 나이로 서울에 혼자 가게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고, 또 신진을 곧 외적시(外敵視)하는 완고한 어른들의 견해 때문에 끝내는 갈 수가 없었다. 그 후에 고장의 학자인 난고 김사겸(蘭高 金思謙)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나, 불과 2년에 도리어 사장(師長)의 학문을 능가함으로써 집에 돌아와 자습으로 학문과 도덕을 익히고 닦고 실천하니 그의 경륜은 인근 사람들을 감복케 하였다. 이에 원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문하에 들어오므로 후진 양성에도 힘써 제자가 150여 명에 이르니 구식교육이 빛을 보는 때가 아니라 비록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지방의 문물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격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런 분이 어사(御史)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어사란 별칭이 나붙게 되고 널리 통용되어 왔다. 선생의 원래 아호인 벽초(碧樵)는 실상 잘 불리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음이 같은 어사(漁沙)로 호를 별칭 따라 고쳐 부르기까지 하였다. 선생은 문장에도 뛰어나 송병순(宋秉珣)선생의 연재예의변론 편찬(淵齋禮疑辯論 編纂)과 전우(田愚)선생의 간제집강(貝齋執講) 때 주역으로 유적지(遣跡地), 연고지 등의 기록을 수년동안 탐방 수집하여 상·하 합권의 '어사사고집(漁沙私稿集)'으로 정리한 것이 있어 편린(片鱗)일 망정 선생의 행장과 인격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은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는데, 배위(配位)도 또한 87수를 누리며 부부가 다같이 장수하여 회혼을 지내는 등 해로하는 복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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