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면(宋基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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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 2008
호남의 거 유(巨儒) 송 기 면(宋基冕) (1882년 ∼ 1956년)
 
조선조 말엽부터 일제(日帝)치하를 거쳐, 건국 초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거유(巨驚)로 숭앙받았던 선생은 1882년 9월 16일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증조는 신호(信浩)요, 조부는 주진(柱振)이며 부친 응섭(應燮)과 모친 전주 최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맨끝으로 태어났다. 부친 요호공은 당시 효행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며 모친 전주 최씨는 정숙하고 인자하기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생의 나이 5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흘어머니 최씨 부인과 어려운 생활속에서 생활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한번 시작하면 날 새는 줄 모르고 공부를 하였는데, 겨울 밤에는 빙설로 눈을 씻어 잠을 쫓고 책을 읽었다. 선생은 13세 되던 해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강사(講舍)를 마련하고 실학자 석정(石亭)을 첫 번째 스승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스승을 모신지 10여 년동안 그의 학문적 진수(眞髓)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수 받았다. 1906년에는 드디어 대한제국의 정부에서 박사 과를 선발한다는 공포가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에 응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라 형편은 정도(正道)를 취하기보다는 온갖 부정과 그릇된 버릇에 의한 방법으로 썩은 인재를 등용하는 판국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벼슬을 그만두고 두 번째 스승 간재(艮齋)를 찾아 학문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유학 정신에 의한 인격의 함양이 수양된 셈이다. 간재 학문에 힘입어 심성이기(心性理氣)와 본말존비문제(本末尊卑問題)에 관하여 잠심(潛心)하였고, 고향인 요교 마을에 강사를 마련하여 후학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니 모여드는 문도 (門徒)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선생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연구에 몰두하여 식사하는 일 조차 잊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유가경전(儒家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면서 정의와 도리를 무관한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선생은 언제나 근세 유학에 있어서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문제가 불분명함을 걱정하였고 이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통박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심(心)을 성(性)으로 보고, 기(氣)를 이(理)로 보아 심(心)을 지존처럼 여기는 데서 세도 인심에 화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선생의 학문적 방법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이 추구하는 희성과 희현을 지향하여 욕심을 버리고 법도를 준수하며 연구하였다. 선생은 본래 경제에 대해서도 많은 재능이 있었다. 만년에 정경(政經)에 관한 포부를 망언(忘言) 2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망언 1과 2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언 1(忘言)에서는 지도자와 민중에 관한 문제, 의리와 의욕, 불변하는 법칙과 웅변하는 도리의 문제, 강자와 약자의 문제, 문과 무의 문제, 빈곤과 부유의 문제, 생과 사의 문제, 시와 비의 문제, 용맹과 비겁, 성공과 패배, 번영과 쇠멸, 공과 사, 전문직업에 대한 면려, 인내력의 유지, 지혜의 개발 등 사회 과학에 깊은 관심과 학문적 경지를 이룩하였다. 망언 2(忘言)에서는 중국 청말(淸末)의 학자 양계초(梁聲超)의 정치 .사상을 일면 받아들이면서 독특한 견해에 의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당대의 두보(杜甫)와 송대의 구양수(歐陽脩) 및 소동파(蘇東坡)를 좋아하였다. 선생의 저서는 유제집 부록(裕齋集 附錄)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선생은 서예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이르렀다. 동진(東晋)의 왕희지 필법 위에 미비(米崙)와 동기창(菫其昌)의 행법(行法)을 익혔고, 해서에 있어서는 구양순(歐陽詢)에서 득력(得力)하였다. 이런 경향으로 선생의 작품은 단아하면서도 웅건 하고 유려하면서도 고조하였다. 호남지역에서는 선생이 남긴 글씨의 액자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의 후학들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활약을 하고 있어 한국서예사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서예 대가이시며 아드님인 강암 송성용 선생이 바로 제자이며 자식이다. 선생의 행서 작품은 신필(神筆)에 가깝다고 서예가들이 평을 한다. 또한 선생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지만 나라 사랑하는 조국애는 남다른 충성심이 많았다. 일제치하에서 창씨 개명에 절대 응하지 않았고 국가와 백성을 수호하며 선성(先聖)과 선왕(先王)을 수호하는 것이니 선비로서의 순도(殉道)는 신하의 순국(殉國)하는 의리와 같음을 강조하였다. 다음과 같은 선생의 시에서 그 정의감을 알 수 있다. 「음암전산-음울한 비구름이 앞산을 가리우니
추요출비의-박쥐같은 짐승 놈이 갑자기 달려든다.
종타겁이도-그 놈이 비록 칼로써 위협하나
거간흉중의-내 가슴 속 깊은 의리 끊을 수가 있으랴」
선생은 스승인 석정(石亭)이나 간재(艮齋)를 생각함이 지극하였으며, 노소와 귀천의 구별 없이 성실히 대하였다. 선생은 일흔 네 살 되던 해 1956년 10월 26일 일생을 마쳤다. 비록 벼슬 한번 해 보지 못한 처사(處士)에 불과하였지만, 선생은 만인의 사표가 되는 교육자요, 성리학자이자 우국지사(憂國志士)였다. 그 해 11월 5일 25일 장으로 요교마을의 뒷마을 자학 골에 건 좌로 안장되니 오늘날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찾아와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묘하에 사당과 강당을 짓고 춘추로 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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