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복남(白福男)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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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 교육의 선구자 백 복 남(白福男) (1906년∼1968년)
 
* 출생지 : 금산면 금산리 259

선생은 수원 백씨(水源 白氏) 시조의 41대 손으로써 백낙관의 2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1906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59번지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중류정도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초등 학교(보통학교)도입학하지 못한 선생은 부모 슬하에서 한문을 익히며 자랐다. 그리하여 선생은 나라 잃은 슬픔과 배우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쳐 어떻게 하든 굶주린 지방민을 도와주고, 학교를 지어 후세 교육에 힘써야겠다는 높고 큰 뜻을 세웠다. 청년이 된 선생은 먼저 금산면 금산 리에서 배급소를 경영하여 불쌍한 주민을 돕는데 앞장섰다. 그러면서 1930년대부터는 교육입지(敎育立志)의 뜻을 달성하기 위하여 금광(金鑛)에 몰두, 7년여의 노력 끝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1940년대에는 삼림 벌채 사업에 힘을 써 학교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1944년 드디어 원평소학교 금산분교의 인가를 얻어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학교 설립인가를 얻은 선생은 모은 재산을 털어 교지(校地) 4,000㎡를 확보하고 교사(校舍) 1동을 지어 나라에 바침으로써 그간 8㎞에 이르는 먼길을 걸어다녔던 학생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제2세 국민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그 후 선생은 금산중학교, 금산상업고등학교 건립에도 목재를 희사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금산(金山)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다 하였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5일 62세를 일기로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고 지역 주민들의 애도 속에 금산면 금산리 오리알터 후록에 고이 잠들었다. 선생은 슬하에 6녀를 두었는데, 모두 부모의 뜻을 쫓아 교육계에 투신 후세 교육에 몸바쳐 일하고 있으며, 금산초등학교 교정에는 1948년 10월 금산면 청도리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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