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양(趙遂良)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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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바꾼 충절
조 수 양(趙遂良)
 
공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청평공(請平公) 김제 조씨 진생(珍省)의 큰 아들로 지금의 김제시 옥산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덕행과 학문이 뛰어났던 공은 세종 15년인 14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郎)을 시직(始職)으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형조(刑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대사헌(大司憲),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평안도감사(平安道監司)를 지냈다
.

공을 아는 사람들은 공을 시종신(侍從臣)이라 부른다. 그 까닭은1457년(世祖 3年) 단종(瑞宗)이 상왕(上王)으로 계시다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로 유배될 때 단종을 모시고 영월에 가서 그 곳에서 순절(殉節)하신데서 비롯된다. 앞에 기록한 바와 같이 문헌에 많은 관직(官職)이 수록되고 있으나 세상을 떠난 후 공을 소개하는 문헌은 거의가 시종신임을 수록하고 있다. 아울러 최후의 관직인 평안도 감사가 유난히 기록되고 있다.
그 예(例)를 들면「전고문헌(典故文獻) 씨족인물고(氏族人物考) 김제 조씨」란에는 공이「문(文) 평안도감사(平安道監司) 단종손우영월시(瑞宗孫子寧越時) 이시 종신순절(以始終臣殉節)」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단종실록」에는 「절의록」에 시종신을 말하는 기록이 많다. 강원도백 부임시 지은 참판(參判) 신인손(辛引孫)의 「청화(請和) 시(試)」가 공의 고결한 학문과 덕과 인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공이 순절 직전 관복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남긴 유언은 후손은 물론 충효(忠孝)의 정신을 굳게 지키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니 크나큰 불효를 용서해 달라 이르거라. 그리고 이 관복을 받들어 전하고, 관복이 도착하는 날을 제삿날로 정하라고 하거라.」실로 충신의 곧은 절개를 엿보게 하는 비장한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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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世祖)의 보복이 두려워 시신조차 거둘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은 묘소도 없다. 그렇지만 공의 거룩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김제시 입석동 동두동에 후손들이 단(壇)을 모시고 단제(壇祭)를 지내고 있으며,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대왕릉(瑞宗大王陵) 아래에 당시 충절을 지켜 목숨을 버린 266명의 신위(神位)를 모신 조사단(朝仕壇)이 있는데, 공을 제일 높은 곳에 모셔 매년 영월 군수의 집전으로 단종제와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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