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암(鄭華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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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 1863
전북 김제시 장화동에서 1896년 9월 14일 출생하였다. 선생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휘(諱)는 현섭(賢燮)으로 자는 윤옥(允玉)이며 호가 화암(輦岩)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6월 백남규(白南奎), 정봉수(鄧鳳洙)와 협의하여 이기순(李基順)을 상해로 파견, 일본 유학생 대표인 이정규(李丁奎), 이종제(李鍾齋) 등과 독변부(督辯府)를 조직하여 국내연락망을 결성하는 한편 7월에 미국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을 경유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敵府主義者聯盟) 결성을 준비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노령(露領) '일크스크'에서 개최되는 극동혁명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도중 북경에서 정세의 변동으로 중지하고, 국내운동의 연락을 위하여 다음 해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국내 연락망을 조직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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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월 복건성 천주시 에서 강남 25현민단편련처를 중국 동지 전산망과 조직하여 농촌의 자치자위조직운동을 전개하면서 복건전성의 일화배척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 ·한일원(韓一元) ·이을규(李Z,奎) 등과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 무정부 주의자연맹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정(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달(李達)·이하유(李付有), 오면식(吳冕植)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를 조직하였으며, 남화 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畜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 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더 강화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 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 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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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 원심창, 백정기(白貞基), 유기문, 이용준(李容俊), 진수방(陳樹翡), 전화민(閔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 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木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台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명을 무창로(武昌跆) 육상정이라는 일본 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원심창 이강훈, 백정기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 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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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國)'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8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강, 신정숙, 전복근(全福根), 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10월 상해로 귀환하여 동포를 안전하게 보살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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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상해에서 거류민단장 및 인성학교 이사장에 취임한다. 1948년 귀국했다가 동년 가을에 중국동지들과 연락차 다시 상해로 들어갔는데 49년 중공정부가 들어서 귀국길이 막혀 대만으로 철수하기도 했다.1955년에 이을규, 오남기, 한하면 등 동지들과 사회문제연구회, 자유인협회 등을 조직하여 56년에 민주사회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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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는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에 취임했으며, 동당 고문에 추대(78년)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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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21일 86세를 일기로 서울 은평구 갈현동 392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묘원 묘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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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83년 건국 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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