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맹(李繼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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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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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文藝)에 뛰어난 문신(文臣)  이 계 맹(李繼孟) (1458년 ∼ 1523년)
 
* 자 : 희순(希醇)
* 호 : 묵곡(墨谷), 묵암(墨岩)
* 출생지: 김제시 제월동

공은 1458년(世祖 4년)에 태어나 1523년 (中宗 18년) 66세를 일기로 타계한 조선초 문신이었다.
공의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묵암(墨岩)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공은 고려태사 도(棹)의 후손으로 시조로부터 9세인 언충(彦沖), 광기(光起)가 모두 정당문학(政當文學)이 되어 명가(名家)로 뽑혔다.
증조부 의(豈)는 부여감무를 지냈으며, 조부 대종(大種)은 진원현감을 지냈고, 선대 홍이 사정(司正)이었는데, 공의 대에 이르러 다시 가문이 현달하여 좌찬성을 추증받았고 조부와 증조부도 그 품관작을 추증받았다. 아울러 모친 인천 채씨(仁川 蔡氏) 이상 3대가 정경부인을 봉작하였다.
채씨부인이 공을 임신했을 때 꿈에 학을 보았는데, 공이 태어남에 과연 기품이 있어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다. 어려서 아버지가 별세하자 부인이 학업을 맡게 되었다. 공은 재기가 뛰어나 문예와 식견에 통달하였으며 탁영 김일손, 추강 남효온과 서로 벗이 되어 교유했다. 어느 때에 점필재 김종직이 호남을 안찰하다가 공을 만나 보고는 공을 국사 (國士)로 대우하였으며, 한원당 김광필도 또한 경국제세의 재간이 있다고 기리고 있다.
공은 1483년(成宗 14년) 사마시(司馬試) 양과에 급제하고 부터 교검(校檢), 정언(正言),전적(典籍)이 되었고 고산(高山), 청양(靑陽) 두 고을 현감이 되었으며, 1496년 이조(吏曹)의 낭관,사도, 봉상(奉常)의 첨정, 장령, 전한,집의를 거쳐 동부승지로 올라 좌승지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점필재의 문인으로 사화(史禍)에 연좌되어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1506년(中宗 1년) 반정 후 풀려나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박경(朴耕)의 옥사에 관련되어 다시 진도로 유배되었다.그 후 수개월 만에 풀려나와 예조와 병조참판을 거쳤고 그 사이에 호남 경기 관서의 3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호조참찬 예조판서가 되었다. 1517년에는 주청사로서 명나라에 들어가 대명회통에 잘못 기록된 태조 선대의 행적을 발견하여 귀국 후 보고했다. 그 후 중궁(中宮)책립의 주청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일품계로 승진되고 전토(田土)등을 하사 받았으며, 1519년에는 병조판서로 제수되었다가 해직된 후 향리인 김제에 돌아와 있었는데, 다시 찬성(贊成)으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아갔다.
공은 사관(史館)의 기주관(記注官)으로부터 경연, 춘추관, 성균관 제학, 세자이사(世子二師) 등으로 비록 원직이 갈려도 겸관은 항상 따랐으니 대사헌, 예조, 호조, 참찬, 홍화(弘化) 등의 임직을 여러 차례 지냈다.
여러 차례 소를 올려 퇴관(退官)을 청했으나 허용을 받지 못했는데,1523년 병이 위독하게 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진찰토록 하였고,세자도 조신(朝臣)을 보내 문병하였으나 기력이 다하여 운명하니 향년 66세였다. 그 해 9월 6일에 김제 월산(月山)의 선영으로 운구하여 장사 지냈다.
공이 찬성(贊成)으로 입조했을 때 많은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은 것은 보고는 이를 말리는 상소를 했다가 간당(奸堂)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끝내 와병하게 되었는데, 후에 공의 본심을 알고는 추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침(沈), 준(浚), 척(滌)이다.
공은 천성이 활달하여 선행하는 이와 재질있는 이를 아꼈으며 관서에 있을 때는 자신을 탄핵한 간관(諫官)을 후일 만나서 오히려 위로하고 천거하는 장자(長者)의 풍도(風度)를 보이기도 했다.
주청사로 연경에 들어갈 때에도 병으로 몸이 불편했는데도 기어이 수행 했다.
여러 차례 변고를 당하고도 선비의 도를 굳게 지켜 신하의 도리를 다하니 공의 명성이 후일까지 길이 빛나고 있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여산의 향사, 김제의 용암서원에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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