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기(宋廷耆)

  • 관리자
  • 2019.01.08
  • 1631

효자 송 정 기(宋廷耆) (1623 ∼ 1084)

* : 죽계(竹溪)
*
출생지: 김제군 금구면 불노리

선생은 1623년 인조 1년에 김제군 금구면 불노리에서 태어 났다. 선생의 이름은 정기(廷耆), 호는 죽계(竹溪)이며 여산 송씨(礪山宋氏)이다.
고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휘유익(諱惟翊)이 시조요, 여량부원군 휘송례(諱松禮) 13대 조이고 도승지휘윤(都承旨諱倫) 8대조이다. 아버지는 태수(台壽), 비 전주이씨는 충의위인록의 따님이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데, 과연 어릴 때부터 인후한 천성과 단결한 지조가 뚜렷하고 대인의 기상이 보였다 이때의 스승인 외숙(外叔)이 그 앞에서는 도리어숙연히 조신하였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흥화곡 류백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인 백석공도 현사(賢士)라고 칭하였다 하며, 동춘 송준길(同春 朱浚吉) 선생과 교분이 두터워 동춘 선생을 찾아가면 그 지방분들에게 언제나 "호남의 대유(湖南의 大懦)"라고 소개했다 하며, ()나라 사람이면 이대로 대인시하는 그 시대 그 무렵에 더구나 석학으로 자처한 명인 정희(明人 政喜) 등을 만나 같이 강론하면서 존주대의(尊周大義)란 글을 지어 보여서 이분들을 놀라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사리들은 선생의 지식도학(知識道學)이 얼마만 했던가를 방증한 것이거니와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와병중인 부모에게 두 아우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간호하며 밤을 세웠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묘 옆에 움집을 짓고 백제, 송정(栢齋, 松亭) 두 아우와 전후상(前後喪) 6년을 시묘하니 호랑이가 와서 이분들을 지켰다 하며 묘역 둘레 수리에 잔솔을 옮겨 심어 울창한 송림이 되게하였는데, 언젠가는 한때 송충(松蟲)의 피해가 여기까지 미쳤다. 그들은 그 송충이를 잡아 입에 씹으면서 퇴치를 기원하니 그분들의 효성에 세인들이 감탄하여 이곳을 효정리(孝亭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여지(輿誌)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1684 (肅宗 年甲子)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향인들이 1723(景宗 三年 癸卯)에 학천사를 건립하고 선생을 배향하였다. 당시 좌의정인 송인명(宋寅明)공이 봉안문을 지었다. 그 후 학천사가 화재로 소실되어 유송사로 이향했다가 고종 무진(高宗 戊辰)년에 서원철훼영(書院撤毁令)으로 인하여 철훼되었다가 1975(乙卯)에 선생의 유허(遣墟)인 불노리에다 낙양사(洛陽祠)를 복설(復設)하여 죽계, 백제, 송정 삼형제를 병향하기에 이르렀다. 1797(正祖 二十一年 丁已)에는 나라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를 세우고 정5품인 통덕랑(通德郞) 벼슬을 내리니 정려기(旌閭記)는 오진수현령(吳晋秀縣令)이 지었다. 한편 묘표는 연재 송병준 선생이 찬()하였다. 선생이 평소 제현과 더불어 문자토의(文字討議) 왕복과 문생(門生)의 경지지침(經旨指針) 등 많은 초고(草稿)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실되어 찾기 어려웠던 것을 칠세 손 동찬이 천신만고 끝에 수집 정리하여 겨우 두 권의 유고집이 만들어져 세상에 전하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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