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구(鄭平九)

  • 관리자
  • 2019.01.08
  • 1978

해학(譜謔)과 유머가 풍부했던 정 평 구 (鄭平九)

공의 본관은 동래(東萊)로서 병법과 축지법에 능했던 발명가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맨 처음 해학(諧謔)을 다룬 인물이라고 전한다.

1592
(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비록 그의 관직이 이렇다 할 것은 되지 못했으나 그가 일찍 익힌 병법을 토대로 임진왜란을 예견한 나머지 침략해 온 왜적 섬멸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 비차로 왜국 격퇴(擊退)

특히 공이 발명해 낸 것으로 전해지는 비차(飛車)는 농성중인 아군과 20∼30리 떨어진 곳의 아군과의 연락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이 신발명무기가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임진사(壬辰史)를 적은 왜사기(倭史記)에는 이 비차(飛車)가 정식으로 거론되어 있고, 그 비차로 말미암아 왜군이 작전을 전개하는데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까지 곁들여 나오고 있어 그것이 이곳 출신인 공의 정식 발명품이라면 이 이야기가 한낱 전설이나 야사에 그칠 수 없는 중요한 역사의 기록으로서 각광을 받아야 할 일이다.

이러한 비차(飛車) 발명의 보를 선조에게 몇 번이고 상소를 통해 올렸으나 아무런 계통과 계보가 없었던 공의 상소는 번번이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끈질기게 내는 상소문에 선조는 오히려 요사스런 자의 광언이라고 크게 노여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 임진란(壬辰亂)에 백의종군(白依從軍)

이처럼 꿈이 무산된 공은 필경에는 임진왜란 싸움에 백의종군했다고 전한다공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우리의 관군들은 오히려 공을 뒤따랐다는 것이며 그를 추종하는 관군과 합세해서 진격해 오는 왜적 수만을 물리쳐 임란의 육전에서 공이 나타나기만 했다 하면 왜적은 얼씬도 못하고 수많은 의병의 승리가 있었다 한다.

우리 임진왜란사에는 수많은 의병 승리가 있으면서도 공의 전략이나 그가 거둔 전과가 확실히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임란사의 왜사(倭史) 기록에는 공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공은 또한 해학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재질과 임기응변의 슬기는 우리 나라에서 누구보다 선구자인지도 모른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거짓말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평구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일화와 해학이 있지만 우선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박살 낸 이야기

공이 임란 전에 백의종군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는 확실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나 이 지방에 내려온 전설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진격해(무주, 진안, 장수지방)오자, 공은 그 앞길에다 미리 준비했던 아주 괴상하게 만든 상자(벌통) 수십 개를 나열해 놓았다. 이 상자를 본 왜적들은 앞을 다투어 무슨 보물상자로 알고 때려 부수었다. 그러자 뜻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이 상자 속에서 수많은 벌들이 뛰쳐나와 왜적들에게 침의 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이에 왜적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 무서운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협곡소로(小路)길에 이르자 또한 벌이 들었음직한 괴상한 상자가 즐비하게 길목에 놓아져 있었다.
왜적들은 이런 얄팍한 꾀에 두 번 다시 넘어가는 바보가 되지 않는다고 앙천대소(仰天大笑)한 후 왜적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라고 명했다. 그러자 왜적들은 진군을 멈추고 벌이 타 죽은 광경을 보려고 빙 둘러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에 타던 상자는 요란한 폭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폭음과 함께 순간 수라장이 되어 왜적들은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하고 박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공이 왜인들의 근성을 역 이용해서 두 번째의 상자에는 벌 아닌 화약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 제주방죽 물오리를 판 이야기

공이 제주방죽 물오리(野生種)를 두 번이나 팔아 먹었다는 전설인데, 이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여 화제의 한 토막으로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평소 헤엄을 잘 쳤던 공은 물 속에서 물오리 모양으로 흉내를 내는 것쯤은 보통 이었다 하며 물오리와 똑같은 탈을 쓰고 같이 놀기 일쑤였다 한다.어느 날 한양 사람에게 제주방죽에서 놀고 있는 물오리가 나의 사유물(私有物)이니 헐값으로 사가라고 권했다. 이에 군침이 돈 한양 사람은 산 물오리를 사다가 한양에 가서 그대로 넘기면 큰 돈벌이가 되겠다 생각하고 수천 마리 중 그 반수를 계약하고 증거표시로 자기가보는 앞에서 몇 마리를 잡아다 주었다. 그 한양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에 잡아 가기로 약속하고 댓가를 지불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한양 사람은 필요해서 사람을 놓아 잡으려고 전부 날아가 버리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보니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이에 공에게 손해 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락호락 말려들어갈 공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애지중지 재산으로 기르던 물오리를 전부 날려 보냈으니 나머지 반수의 대가를 변상하라고 청구했다. 이래서 소송을 했으나 한양 사람이 패하고 공이 승소함으로써 나머지 반수의 물오리 값을 받아냈다 하여 세칭 정평구는 제주방죽 물오리를 두 번이나 팔아 먹었다는 전설이 수백 년을 두고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 당산에다 명당쓴 이야기

공은 많은 친구 중에서도 유별나게 친했던 선비 한 분이 있었다그 선비는 청렴하고 강직한 학자였다. 그러나 아주 가난해서 호구지책(糊口之策)도 못할 정도의 생활이었다. 그래서 항시 마음에 걸려 어떻게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해 왔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풍수지리를 잘 아는 거사(居士)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공은 거사에게 당대에 잘 살 수 있는 명당을 하나 잡아 달라고 간청을 했다.  물론 가난한 선비를 돕기 위한 간청이었다. 간청을 듣고 난 거사는 공의 인물됨을 알고 있는 처지인지라 즉석에서 응낙했다. 거사는 당대에 백석을 받을 수 있는 명당이기는 하나 동네 당산이 되어서 힘이 든다면서 자상하게 위치와 좌향까지 지적해 주고 택일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당산에다 묘를 쓴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불가능한 묏자리를 말해 준 거사의 속셈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생색을 쓴 것이 첫째요, 둘째로는 아무리 뛰어난 재질이지만 골탕을 먹이자는 희롱이 담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은 서슴지 않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쪽은 거사였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데도 일언 난색도 없이 즉석에서 감사하면서 일어서는 공의 태도는 의연했으므로 오히려 거사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이후 이 사람한테 틀림없이 봉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거사의 거동을 보고 공은 박장대소 끝에  "좋은 명당을 일러주시고 무엇을 거사께서는 그렇게 두려워 하시요. 안심하시오. 이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하리라." 공은 거사가 일러준대로 선비와 의논 끝에 명당을 쓰기로 합의를 보았다. 며칠 후 야음을 틈타 암장을 했다. 그런 뒤 공은 그 동네 주변마을에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
서울 어느 대감이 마을 당산에 명당이 있는 것을 알고 몇 월 며칠 경에 이곳에 와서 장사를 지낸다고 하더라."
  
이렇게 소문을 내자 순식간에 그 마을까지 소문은 번져나갔다. 그 마을 촌로들은 머리를 맞대고 걱정으로 날을 보냈다.  권력으로 막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해야 당산 명당자리에다 묘를 못쓰게 하느냐 하는 방법을 숙의했으나 신통한 안이 나오지를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묘를 쓴다고 하면 동네 일촌은 모든 멸망이 되는 것이어서 여기에는 생사 문제가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네 사람들은 초상을 당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 술에 취한 공이 동구에 나타났다. 촌로들은 공을 보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소문에 들리는 말을 공에게 낱낱이 이야기해 주고 좋은 묘안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했다. 말을 듣고난 공은  "아무 걱정들 마시고 술들이나 자시요" 하였다. 공의 말을 듣자 촌로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 쉬었다. 공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 명당 자리에다 미리 거짓 봉분을 지어 놓으면 아무리 고관 대작이라도 타인의 묘를 허물고 쓰지는 못할 것이니 거기다 봉분을 지어 놓으면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동네 일촌 사람들은 기발한 착상이라고 좋아 하면서 공이 암장한 묘 위에다 봉분을 크게 쌓아 놓았다는 것이다.

 
시골양반 골탕먹인 이야기

어느 해인지 큰 가뭄으로 못자리는 타고 논바닥은 갈라지고 이앙기는 늦어만 가는데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울상이 되어 앙천탄식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늦비가 와서 농민들은 기뻐하며 모를 내고 있었다. 이때 패랭이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쓴 공이 논두렁을 부지런히 뛰어가다시피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촌 양반들이 그저 두지 않고 농을 걸었다.
  "
여보게 평구.」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나. 거짓말 한번 해보게 ! 이제는 안 속네‥‥‥
  
그러나 공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바쁘게만 걸어 갔다
   "
이놈 평구야.」 양반의 말씀에 대답도 없다니 고얀 놈이구나. 어디 또 우리를 거짓말로 속여 보아라‥‥‥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길을 막고 불호령이 떨어진다. 공은 이렇게 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촌 양반들을 흘깃 쳐다본다.
  "
이렇게 늦비가 쏟아져 모를 심느라 일손들이 바쁜데 모도 심지 않고 바쁜 사람 데리고 희롱하는 별 촌양반 다 보겠네‥‥‥
  
내뱉듯이 쏘아대곤 바쁜 걸음으로 가려하자 촌양반들은 네까짓 하잘 것 없는 상놈이 뭐가 바쁘다고 으스대느냐고 또 한번 호통이다. 더 없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공은 인내를 하는 것인지 내심 묘책을 세웠는지 가로막은 촌 양반을 밀어내고 잽싸게 걸어 나갔다. 이러한 공의 태도가 평상시와는 아주 다르게 심각한 표정이어서 필유곡절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촌 양반들은 다시금 불러 세웠다. 그리고 겸손하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선 공은
   "
때와 장소를 가려서 농을 해야지, 남은 급한 공무를 띄고 뛰어다니는데 너무들 하십니다. "
하고 오히려 책망하는 말투였다.
  
촌 양반들은 더욱 궁금증이 나서 무슨 일이냐고 묻자 공은 무슨 말을 할까 말까 엉거주춤하니 서성거리다가 잠시 후에 한 촌양반 곁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
이건 절대 비밀이니 당신만 알고 계시오"
하면서 가만히 소곤거렸다. 내용인즉 오랜 가뭄에 시달린 군민들의 정상을 참작하시고 내일 오전에 성주님이 휼민(恤民)하는 뜻에서 쌀기민을 준다는 공무로 없는 사람들을 찾아서 고하고 다니는 바쁜 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촌 양반들은 반신반의했으나 공의 평상시와 다른 태도와 또한 큰 가뭄에는 휼민하는 사례가 있는지라 공의 말을 믿게 되어 이튿날 모내는 일도 제쳐놓고 동네 일촌이 동헌(東軒)마루로 몰려갔다. 공의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버린 것이다.  촌 양반들은 분통이 터져 이놈 평구를 만나면 주리를 틀어 놓겠다고 노발대발했으나 며칠 후 공을 만난 자리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여러분들이 공연히 나더러 거짓말을 한번 해 보라고 하도 성화같이 야단하기에 거짓말을 한 것뿐인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
고 되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앞으로 선량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고 나오는 바람에 촌 양반들은 꼼짝 못하고 당했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 소금장수를 골탕먹인 이야기

  7
월 노염에 암소 뿔 빠진다는 늦더위가 심한 어느날, 공은 공무로 서울을 올라가고 있었다. 길 옆 계곡에서 시원한 물로 더위를 씻고 있는데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사내가 다가오더니 소금짐을 옆에 내려놓고 세수부터 하기 시작했다.  일견해서 무식한 소금장수였다. 그늘 밑 바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때 공이 자기 패랭이 위에 꽃아 놓은 담뱃잎을 가리키며 소금장수에게 수작을 부린다.
  "
노형. 내 담배는 젖어서 피울 수가 없어 그러니 거 담배 한 대 얻어 피웁시다. "
  
그러자 소금장수는 어느 결에 공의 패랭이 위의 담뱃잎을 와락 낚아챘다. 그리고는  "나는 젖은 담배도 없으니 젖은 담배라도 피워야겠소."
이런 꼴이 있나 김제에서 길을 떠나면서 이런 식으로 남의 담배만 피워왔는데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밑천마저 소금장수에게 빼앗기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한 노릇이다. 공이 이렇게 봉변을 당해 보기는 평생 처음이라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은 소금장수와 오순도순 말 벗삼아 동반이 되어 서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느 동네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길가의 콩밭에서 7∼8명의 아낙네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공이 밭으로 들어 가면서 "X X"?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한 여인이 일손을 멈추고 일어서서 공을 바라본다.
  "
아주머니 여기 계신줄도 모르고 찾았습니다. 저기 저 친정어머니가 간밤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음을 가지고 왔습니다요."
  "
? 아니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다니‥‥ !"
  
아낙네는 어쩔줄 모르고 허둥지둥 산발을 하고 울면서 공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공은 잽싸게 다가오는 아낙네의 두 귀를 잡고 보기 좋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금장수보고
  "
형님 ! 형님 빨리 도망가자"  고 소리치고는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런 광경을 본 인근 농부들이 가만 있을리 만무하다. 손에 농구를 든 채 소금장수 쪽으로 몰려 왔다. 소금장수는 무거운 소금 짐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형의 입장이 되어버려 몰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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