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중(朴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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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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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수축 때 공이 큰 박 희 중 (朴熙中)

공의 초명(初名)은 희종(熙)이며 자()는 자인(子仁) , ()는 위남(葦南)인데 진원(珍原) 사람이다.

1401
(太宗 1) 문과(文科)에 병과(丙料)로 급제하여 문형(文衡)에 뽑히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올랐는데 왕이 그의 기국(器局)을 중히 여겨 친필(親)로 이름자 종()을 중()자로 고쳐 주었다. 그후 지제교(知製款) , 기주관(記主官)에 오르고 1405 (태종5) 이조좌랑(吏曹佐郎)이 되었다.
이듬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오르고 1415 (태종 15)에 특명으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김제벽골제(金提碧骨堤)축조의 감독을 맡았는데 수리민이 공적을 칭송하는 비()를 세웠다. 이듬해 동궁 서연관(東宮 書筵官)이 되고 1421(世宗3)에 외직으로 영암군수(靈岩郡守)로 나아가 선정(善)을 하였고 권사흥학(勸士興學)에 힘썼다. 그후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423 (세종5)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특진되어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갔는데 지절(志節)이 준정(俊井)하고 문장이 화려하며 습속이 크게 다른데에 경복(敬)하였다한다.

1429
(세종 11)에 홍문관 제학겸 대사간(弘文館 提學兼 大司諫)에 이르러 옥당(玉堂)의 동료들과 하연 (河演)의 집정천권 (執政遷權)을 상주(上奏)하고 치화진원(致化珍原)으로 돌아와 은둔했다. 1447 (세종29)에 이조참관(吏曹參判)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변계량(卞季良) , 하륜(河崙)등과 도의로서 서로 교분을 두텁게 하였다. 성석린(成石璘) 이숙(李淑)과 함께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르고 진원군(珍原郡)에 봉()해졌다. 이조판서 (吏曺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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