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휘소(羅徽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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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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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습답을 옥토로 바꾼 나 휘 소 (羅徽素)

공의 휘()는 휘소(徽素) , 호는 월암(月菴)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

중조(中組)의 휘는 중우(仲偶)로 공의 13대조이며 대대로 학행과 벼슬로 이어왔는데 공의 9대조인 안세(安世)는 학행과 효도로 추앙되어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되고 팔효사(八孝祠)의 주벽(主壁)이다.  공은 창일(昌一)의 차남으로 1741 (英祖 17年辛西)에 깁제구 월촌면 신월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본시 천성이 어질고 팔호가문의 연원(淵源)을 이어받아 하늘이 내린 효성으로 부친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여러번에 걸쳐 도천(道薦)되었다선생은 또한 국량(局量)이 넓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뜻이 깊어 향당(鄕黨) 에서 경모되었다. 월촌면 표박평 (畿珀坪월촌면 신월리 앞 翡은 들관은 표주박 같은 현상이어서 일명 "표박구레 "로 전해오고 있음)은 남으로 정읍군 감곡면 삼평리요 동쪽은 봉남, 황산면과 그리고 북쪽은 김제읍에 접경되어 있어 벽골제 내(碧骨堤 內)에 위치한 곳이고 원평천(院坪川)이 흐르고 있어 옛날에는 용배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조금만 비가 내려도 광활한 평야는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영농을 할 수 없게 되어 방치하자 갈대밭으로 변하여갔다.
이러한 광경을 보아온 공은 이를 개탄하고 많은 사재를 내놓아 1784(正祖 8年 甲辰)부터 1787년에 이르는 4년간에 걸쳐 빈약한 기구로 공사를 착수했다. 넓이와 깊이 각 6(신척) 길이 4 8백여척에 달하는 거창한 용배수로 공사를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황폐된 광야가 침수없는 옥답으로 일변되어 해마다 풍작을 이루게되자 그 공로가 1797 (정조 21)에 조정 (朝廷)에도 알려 졌다 .

신월리를 비롯하여 전기(箭基) 월락(月落) 반월(半月)리등 인근 네 개마을 대표인 이광석 (李匡錫) 31인이 공의 희생정신의 공로를 오래오래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 1728 (純祖 27년 丁亥)에 월산면 신양계 (月山面 新梁蝶, 註그당시에는 新月里를 비롯해서 네 개 마을이 모두 月山面에 속한다. )를 창설하고 공이 서거한 22년 뒤 1832(純祖 22年 壬辰)에 박진계 (朴震啓) , 이광석(李匡錫)등 네 개 마을 대표가 주동이 되어 인근주민의 뜻을 모은 결과 현 월촌면 신월리 앞산에다 공적비를 세우고 추모하기에 이르러 현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공은 69 세를 일기로 1809년에 타계하였다. 묘소는 김제군 용지면 상솜삼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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