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승(趙周昇)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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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의 천재 조 주 승(趙周昇) (1854년∼ 1903년)
 
* 자 : 장일(章日)
* 호 : 벽하(碧下)
* 출생지: 전북 김제시

선생은 1854년(철종 5년) 11월 29일 전북 김제시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천성이 온후하고 독실하며 예능에 대한 재주가 출중하였다.뿐만 아니라 독서광이라고 할만큼 독서를 생활화하였으며 또한 지필묵(紙筆墨)을 일상 곁에 두고 가까이 하여 일찍부터 석정(石亭) 이정직에게 사사하였는데, 그의 장기(長技)는 해서(楷書)와 사군자(四君子)가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선생의 자는 장일(章日)이요, 아호는 벽하(碧下)이다. 본관은 김제이며 고려조에 대장군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벽성군에 봉작되고 문하좌시중에 오른 조연벽을 시조로 모시고 고(考)의 휘는 하섭(河燮)이요, 비는 현풍 곽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씨쓰기를 즐겨서 선생의 부친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글씨 쓰는 도구와 재료를 불태우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제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아들 하는대로 내맡겼다. 선생은 普, 唐, 宋 여러 나라 대가들의 글씨를 보고 감탄하고 '한 점, 한 획인들 서법(書法)에 헛되지 아니하리라' 다짐했다. 수 년동안 꾸준히 정진한 왕대령(王大令)의 락신부(洛神賦)와 안로공(顔魯公)의 가묘비(家廟碑)의 진수를 체득했으며, 석정 이정직의 문하에 들어 10여 년동안 文, 詩, 書, 蘭, 竹의 그림 그리는 법과 시조,거문고 등 일곱 가지 예능을 수련하여 깊은 경지에 들었으니 글씨에 있어 부드러운 운치는 스승인 석정(石亭)보다 앞섰으며, 대를 그리는 솜씨는 더욱 뛰어나서 자하 신위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평이었다. 시창과 탄금에 있어서는 악공이라도 따를 수 없는 놀라운 경지에 들었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은 선생의 예능을 사절(四絶)이라 칭송했다.
금강산 유점사 주지가 찾아와서 유점사에 '대응보전'현판을 써 주기를 간청하니 유점사 주지와 6개월동안 같이 기거하면서 현판을 썼다.6개월의 세월이 지나니 철이 바뀌어 대사의 옷이 계절에 맞지 않는지라 빈곤한 생활에 주지의 옷을 마련해 줄 수 없어 선생이 교통편으로 이용하시던 당나귀를 팔아서 옷을 마련하여 주었다. 옷 한 벌과 현판글씨를 주며 주지에게 6개월간 쓰신 현판글씨의 화선지가 가득 찬 창고를 보여 주며 선생이 심혈을 다했음을 말하니 주지께서 감동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칭송했다 한다.
대원군께서는 선생의 글씨와 란을 보시고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 칭송하셨으니 공의 솜씨가 뛰어났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만년에는 더욱 생계가 곤란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조촐한 몸가짐으로 태연자약한 나날을 보냈다.
일찍이 중국에 가서 북경과 남경에서 3년을 유람하는 동안 이름난 학자들과 어울리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들과 교유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귀중한 서화를 수집하여 가지고 돌아와 탐상하는 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으나, 뜻하지 아니한 갑오동란난리 때 애석하게도 병화(兵火)를 입어 집과 함께 소실되었다.
몽인 정각교는 선생의 글씨를 구양순에 비겼고, 매천 황현은 송일중, 이삼만, 조주승을 손꼽아 정족(鼎足)이라 칭송하여 아동(我東)의 천추의 필원(筆苑)이라 논정(論定)했다.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을 비롯 선생의 많은 현액이 있으며 전주 남고산성 관성묘 현액을 쓰고 관우가 나타나 데려간다는 현몽 3일만인 서기 1903년 6월 13일 향년 50세로 청렴결백한 선비의 일생을 마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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