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석(趙沂錫)

  • 관리자
  • 2019.01.08
  • 1856
시 화(詩晝)의 달인 조 기 석 (趙沂錫) (1876년 ∼ 1935년)
 
* 호 : 심농 (心農)
* 출생지 : 김제시

선생의 이름은 기석이요, 호는 심농(心農)으로 김제 조씨이다.
시조 벽성군(碧城君)의 22세 손이며, 당대 명필로 알려진 주승(周昇)의 아들로 1876년(高宗 13년 丙子) 3월 12일에 출생하였다.
선친의 재능을 이어받아 해서(楷書)와 행서(行書)에 뛰어났으며 사군자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선생은 창씨와 삭발을 하지 않았으며 왜인의 오만방자한 꼴을 보기 싫다고 하여 세상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담 한 마디 하지 않고 좀처럼 웃지도 않았다. 나라를 잃은 국민이 웃을 수가 있냐며 웃는 주변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하여 선생의 충성심과 항일사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선생은 처음 부친인 벽하(碧下)에게 사사(師事)하여 차츰 일가를 이루어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죽(竹)」이라는 제명으로 입선하였다.
묵죽도(墨竹圖)는 당시 김제를 중심으로 하여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송기면(宋基冕), 박규환(朴奎喚), 조주승(趙周昇) 등이 그렸던 양식인데 시작의 형태와 죽엽(竹葉)의 모양이 개자식(介字式)이나 팔자식(八字式)의 첩죽엽(疊竹葉)으로 그리는 것이 공통적 이었다. 선생의 묵죽도 이런 양식으로 그렸는데, 구도(構圖)의 밀도가 없고 한산한 것이흠이나 사대부(士大夫)적인 절개는 높이 평가된다.
선생은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나 고향인 전북지방에서는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한 번도 갖지 않았는데, 전남과 충남에서 전시회를 각각 한번씩 했다 하며 선생의 유품 또한 매우 희귀하다 한다. 그러나 많은 문헌에 선생의 명필이 소개되고 있으며 전주 청학루 현판과 전주시 덕진연못에 소재한 취향정 현판이 현존하고 있다.
대나무 그림의 화재에 다음과 같은 멋진 시구(詩句)가 있는데, 이것이 선생의 창작시 인지 진부는 알 수 없으나 다음에 소개해 본다.
「小扉春鏡緣 窓前夕也勝 潮江煙雨中」
(작은 병풍 속에서 봄 기운의 신록을 감상할 수 있고, 창가에 석양은 비길데 없네. 소양강에 안개가 깔리고 비가 내린다)라고 하는 문인적(文人的)인 시구가 적혀 있다.
선생은 말년에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서 제자 30여 명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영향을 받아 후일에 명필이 되었다 한다.
선생은 1935년 향년 57세로 전주시 교동에서 별세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주를 아쉬워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