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완(柳永完)

  • 관리자
  • 2019.01.08
  • 1839
사군자에 뛰어났던 서예대가 류 영 완(柳永完)(1892년-1953년)
 
* 호 : 류하(柳下)
* 출생지: 김제시 교동 향교골

선생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아호는 류하(柳下)이다.
1892년(고종 29년) 김제시 교동 향교골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1953년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또 글보기를 즐겨 해서 글재주 좋은 부전자전의 '글집의 아들'로 불려졌다
그의 선친이 글을 숭상하고 또 그 글로 평생을 종사했기 때문에 가세가 빈곤했으니 아들만은 글을 멀리 하기를 원했으나 그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극성으로 글을 섬기더라는 것이다.
선생이 천자문을 외우고 사서삼경을 공부하여 필묵을 갖춰 정식으로 서예에 입문한 때가 겨우 11세 때였으니 그가 얼마나 학문적으로 일찍 깨우쳤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선생은 서예로서 그의 선천적 재질도 훌륭했지만 그의 끈질긴 노력이 더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 판자에 물글씨로 연습 밤을 낮삼아 글쓰기가 예사였고, 제대로 지묵조차 갖출 수 없었던 빈한한 가세로 먹 대신 붓에 물을 찍어 판자에 글을 썼다는데 필경 그 판자가 썩어나가기까지 했다니 그의 강한 의지와 집념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이기에 그의 나이 20세에 이르러서는 이미 청년명필로 이웃은 물론 전라도에서 차츰 그 이름이 떨쳐지기 시작한 것 이 다.
특히 그 무렵의 우리 나라 국필로 알려진 오세창은 우연한 기회에 전라도 땅에 와서 청년 류하의 글씨를 보고 장래 대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재질을 갖춘 글씨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글씨는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향(京鄕)간에 퍼져 당시 이름있는 서 도가들도 김제땅을 찾아 류하의 글씨에 감동하고 스스로 그의 사사를 원하는 서도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류하의 서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해서(楷書)와 묵화의 죽(竹)이다. 먼저 그의 해서는 그가 일찍부터 중국의 국필들인 왕희지나 동기창, 구양순 같은 이른바 정통서도의 서첩들을 수집하여 오랫동안에 걸친 필법 연구를 해왔고 거기에서 해서체의 시조이자 그 절묘한 서체를 자랑해 온 구양순의 필체를 완전히 터득했다는 것이다.
· 오행의 정통 해서를 터득
구양순의 해서는 한자에 의해서 오행(五行)의 정서(正書)를 기초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정자인쇄체의 표본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그 무렵 경향의 대가 몇몇은 류하의 해서가 구양순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퍼붓기도 하였는데, 그 모방이라는 것이 바로 정통의 해서로 구양순 이후의 류하라는 양논으로 한동안 서계의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니게 아니라, 고금을 통한 중국의 명필 구양순이 직접 쓴 예천명(일명 구성궁 예천명이라고도 불리는데 구성금은 구중궁궐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협서성 기주에 있는 구성 금안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그대로 탁본한 것임)은 류하가 쓴 해서와 똑같고 그것은 또 구양순 필체의 철저한 영향을 받은 류하라는 점에서 달리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없다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류하의 해서는 글씨에 살이 붙지 않은 뼈만 간추려서 이어진 것 같은 마치 면도날로 새겨 그린 것처럼 규칙
적(정서자)이고, 정력적이라는 사계(斯界)의 평이다.
· '류하의 죽' 독보적 존재
서도와 함께 묵화를 치기도 한 선생은 사군자를 포함한 육군자(石,松 포함)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가의 경지를 보였고, 특히 사군자중의 대나무는 류하만이 그 오묘한 절치(絶致)가 숨었다 하여 당시 국내에서는 '류하의 죽'으로 알려져 거의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한다.
묵화에서 류하의 죽을 즐기는 경향간의 뜻있는 사람들은 낯선 김제 땅에까지 찾아와 그가 그린 그림을 얻으려 백방으로 주선하는 등 인적이 그의 집 문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집은 찾은 손님은 번번이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예술의 상품화를 배격
그것은 그의 글과 그림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예술의 경지만을 위해 쓰여지고 그려질 뿐이지 어떤 상품이나 도락(道樂)의 취향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서예관 때문이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그를 그의 이웃이나 다정한 벗들은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류하의 생활이 너무 곤궁하기 때문이었다. 끼니를 건너 뛰기가 다반사였다고 하는 그는 그럴 때마다 여러 벗들로부터 "예술도 좋지만 먹지 않으면 예술도 못하는 것, 그러니 그대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림과 글씨를 팔아서 생활에 보태는게 어떠냐"고 충고를 하면 류하는 "생활은 생활이고 예술은 예술이요, 비록 굶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작품을 상업의 방법에는 내놓기 싫소"하고 오히려 그런 충고를 하는 벗들에게 서운해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특한 그의 개성과 예술적인 그의 숭고한 이념으로 다져진 순수가 아니라면 그의 그러한 역경에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청렴과 결백을 생활신조로 아는 류하는 또 그 예술을 남에게 나타내지 않으려는 곧은 성격이었다. 그가 25세 때인 191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묵화가 처음 특선되었는데 그것도 그가 솔선해서 작품을 낸 것이 아니라 그의 주위 친구들에 의해 출품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몰래 미술전람회출품 특선
결국 특선이라는 최상의 영광이 떨어졌지만 그는 그러한 특선에 반가움은 커녕 그 작품을 낸 친구에게 오히려 역정을 냈다는 이야기다. 그의 그러한 태도는 어느 의미에서 그의 고답적(高踏的)이고도 고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나, 어떤 의미에서 예술과 창작은 발표에 그 의의와 목적이 있는 것이니 만큼 일말의 유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러한 성격의 일단으로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널리 소개되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 수다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후만 하더라도 그러한 그의 고집은 외부에 발표하기 위한 작품은 의식적으로 회피했다는 것이며, 이러한 그의 품성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친구가 본인도 모르게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 국전에 출품 특선케 하는 등 오히려 그의 주위에서 아까운 류하의 재질을 더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정통예술의 보다 많은 발전을 위해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류하는 1953년 62세를 일기로 인간생활의 영화같은 것은 외면해 버린 채 평생을 외롭고 가난한 예술인으로 인생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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