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열(崔輔烈)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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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의 문학도 최 보 열(崔輔烈) (1847년∼ 1922년)
 
* 자 : 국명 (國明)
* 호 : 운정 (雲亭)
* 출생지: 김제 만경읍

  선생은 전북 김제 만경읍에서 서기 1847년(憲宗 13年 7月 13日)에 태어났다. 이름은 보열(輔烈)이요, 자는 국명(國明)으로 호는 운정(雲亭)이며,전주 최씨 이다.
선생의 세계(世系)는 고려 충숙조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시문성공 봉완산군 휘아(諱阿)가 비조(鼻祖)이다. 고려조에 홍문관 교리, 특진 함경감사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함흥부윤 등을 지낸 휘진손(諱震孫)이 그 현조이니 문성공 아(阿)의 21세 손 성하(聖河)의 아들로 비(妃)는 밀양 박씨 한직(漢直)의 따님이다.
선생은 본바탕이 가난한 속된 말로 씨가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문장으로는 부(富)를 이룬 자라고들 한다. 그 가난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거처 옮기기를 열일곱 번에 이르러 떠돌이같은 처지에도 오히려 마음이 고요하며 욕심이 없는 듯이 상심을 얼굴에 나타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풍채가 좋고 키가 크며 위엄있게 보였으나 온화하고 부드럽고 순하고 조용하며 인정이 두터우며 한번 이야기한 약속은 잊지 않고 실행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며 젊은이나 어른을 구별함이 없이 한결같이 성실하게 대하고 물욕(物慾)이 없이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일거일동 언행이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였기에 모두가 그 덕행을 우러러보았다.
선생은 한때 유학자로써 을사년 3월에는 정읍 태인에서 무성서원(武成書院)의 도내 장의(道內掌議)와 무신(戊申) 6월에는 만경현 도헌(都憲)을 지낸 바도 있다.
이 당시 도내적으로 완고한 유교 도학적인 문류(門流)를 이루고 있는 간재 전(田) 선생보다 선진 개화의 실용적인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해학 이기(海鶴 李沂),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들과 동성상응(同聲相應)하며 학문의 과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서 전통적인 도학이 남긴 공리(功利)와 형식 사대봉건적(形式 事大封建的)이면서 시국을 알지 못하는 폐쇄주의적 폐습을 절실히 느끼고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인 실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하여 이에 동참하였다.
선생은 집이 워낙 가난하여 책을 사서 보지 않고 거의 다 사본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사서삼경, 성리학, 예학, 산학(算學), 의학, 역학, 시문(時文), 고문(古文), 시문학(詩文學) 등에 달통하였으며 특히 예학,시문학, 고문, 시문에는 더욱 능하여 모두가 우러러봤다.
선생은 어릴 적에 이웃 아이들과 서로 엉켜 놀 때면 뒤로 물러나서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지 아니 하고 종일 어버이의 옆을 빙빙돌며 노는 등 아버지의 뜻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으며 10여 세 때에는 시문(詩文)을 깨우쳤고, 문장력도 널리 알려졌으며 시문(時文)은 30대에 공부 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학문을 들어 일으키는 일을 삼아 옥(玉)덩이를 껴안고 여러번 팔꿈치를 자르고 기운을 내었으나 아직 바로 잡지 못하고 경서(經書)되풀이 하기를 열심히 하고 옥석(玉石)을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 것처럼 덕행을 닦았으며, 정문(程文)은 소시(少時)에 평정(平定)하여 그 이름이 이미 알려졌고, 고문(古文)은 이미 남방(南方)의 대가로 불러졌으며, 시문(詩文)은 늦게 공부하였는데 언제나 남을 높이고 내 몸을 낮추며 자랑하지 않는고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문장이 풍부하고 더욱 문학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을 즐기심이 남달리 뛰어 났다.
영재 이공건창(李公建昌)이 일찍 고군산으로 귀향가는 길에 만경을 거쳐 가는 도중 관벽(館璧)에 붙어 있는 시문을 보고 돌이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시문작체(詩文作體)한 것이 그 사람과 똑같다고 칭찬하였다.
다. 이 후부터 이름이 더 넓게 알려졌으며 유재 송선생(裕齋 宋先生)은 운정의 시는 당대(唐代)의 중기·만기(中期·晩期)의 작풍(作風)을 근본으로 삼았고, 문장은 북송(北宋)의 육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의 글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여흥 민병승(驪興 敏丙承)은 그 고상한 마음씨, 뛰어난 생각이 아담하고 굳세고 위엄이 있다 하였고, 또 호산 송영대(壹山 宋榮大)는 육경(六經)에 의하여서도 가히 비판할 수도 없고 터득할 수도 없으며 시문에 처음 들어가는 문과 길이 올바르다고 파악, 평한 것으로 보아 남달리 시문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발문(跋文)에서는 운정의 시문은 부드럽고 쉽고 간단하고 담담함은 나무, 돌, 쇠붙이 등에 글씨 새겨 입체적인 물상(物象)을 만드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써 흉내내지 못하며 대체로 옛사람들이 일컫는 출중한 품격의 좋은 가르침이 있는 독자(讀者)라야 그 바른 틀의 칠분(七分)을 가히 터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능하여서 상·제(喪祭)는 반드시 책의 예법대로 행하였으며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선생은 서기 1922년 임술(壬戌)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382번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많은 유생들의 문상과 길게 뻗쳐 있는 만사(輓辭)속에 성덕면 대목리 뒤에 장우하였다.
선생의 유고(遺稿)로는 '운정집 건·곤(雲亭集乾坤)'이라 표제(表題)한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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