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상(崔圭祥)

  • 관리자
  • 2019.01.08
  • 1969
서예의 대가 최 규 상(崔圭祥)
 
* 자 : 백심(伯心)
* 호 : 설송(雪松)
* 출생지: 김제군 진봉면 고사리

1.출 생

선생의 초명은 규하(圭夏)였으나 뒤에 규상으로 불렀고, 자는 백심(伯心) 호는 설송(雪松)으로 1881년에 김제군 진봉면 고사리 돌고개(石峙)에서 당대 유학자 최보열(崔輪烈)과 부인 광주 이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질과 예기(藝技)가 뛰어나 글에 능하신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정진하며 서도에도 전념하였다. 차차 글씨를 배우고 익히자 구양순첩(歐陽詢帖)에서 해서를 익히면서도 안진경체(顔眞卿體)도 익히고 동기창첩(董其昌帖)에서 행서를, 또한 금석탁본(金石拓本)으로 예서를, 보묵헌장첩(寶墨軒藏帖)과 남궁유묵(南宮遺墨)으로 초서를 배우는 등 서예연마에 온 정신을 다하면서도 당대(當代)의 서첩이나 금석문(金石文), 기타 법첩(法帖)을 구하여 필법을 연구하고 계속 연마하여 경지에 오르자 차츰 선생 필체를 창조정립(創造定立)해가는 것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선생은 키가 크고, 소박하면서도 강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하고, 위엄있게 보이면서도 예도(禮道)에 어긋남이 없이 언제나 바르게하며 가식이 없었다.
선생은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요, 명필인 석정 이 선생(石亭李先生定稷) 문하에서 사사하던 어린 10여 세 때부터 글씨 솜씨가 뛰어났었다.
선생은 신식 교육기관인 군산 칙량학교를 졸업한 뒤 서기 1920년에는 김제군청에 잠시 다녔고, 1924년에 김제군 백산면장에 취임하여 7개여년동안 관직에도 있었으나, 언제나 의연한 몸가짐으로 한복을 잘입으며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여 각처의 제각, 정자, 현판, 정려문, 비문 등이 선생의 글씨였다 2.업 적
선생은 서기 1923년에 석교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써 후진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면서도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 등 서도 5체를 고루 폭넓게 수련 연마하여 전통서법을 유지 발전시키어 정묘(精妙)한 경지에까지 이끌어 올린 서예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생의 특장(特長)은 전서(篆書)였는데, 이 전서 글씨가 선생의 글씨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우리 나라 전서 대가(大家)로서 제일인자로 불리던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을 만나 배우게 된 때문이다.
성재 선생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서예 대가로써 중국, 일본 등지에 머물며 멀리 중원(中原)대륙에 까지 그 이름이 떨쳐 있어서 중국에 갔을적에 원세개(袁世凱) 임금님의 옥쇄까지 새겼고 서예고문까지 지낸 분이다.
이의 전각(篆刻)은 일제시대에 제자인 금허 정해창(金虛 鄭海昌)이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맨처음으로 전각전시회를 갖은 바 있다고 하며, 그 이후 운해 민택기(雲海) 선생의 손을 거쳐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와 선생에게 전승되었다.
선생은 성재 선생의 수제자로써 다시금 겸허하게 서예수련을 시작했다. 선생은 주위에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그동안 홀로 익히고 연구하여 닦아온 글씨 솜씨를 보아야 한다는 권고에 못 이겨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으로 예서 한 점을 출품하니 입선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예활동을 하게 되었다.
선생의 글씨는 온아한 성품 속에 숨어 있는 선계의 고절(高節)한 기개가 잘 표현되어 있으며, 자획(字劃)의 묘미는 전체적으로 박실(朴實)한 맛과 극히 자연스러운 아치(雅致)를 느끼게 하며, 어떤 법식이나 자기류(自己流)의 개성미에 매인 것도 아니고 정법(正法)에 머물면서도 정법을 벋어나 속기(俗氣)의 자취를 볼 수 없으며, 그 자신의 심성과 행동이 일치되어 운행(運行)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충분히 맛보게 한다.
선생은 조선미술전을 통하여 서예계에 등단하였으나 일체(一切)의 명리(名利)를 떠나 오직 선계의 양식과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순수한 작품활동만을 일삼으며 나라 안 많은 곳에서 개인전을 갖은 바 있었다. 그러나 거의 우리 전라북도에서만 머물러 있었기에 서울에서 활동했던 지방출신 서예가들 보다 이름이 적게 알려졌지만 지방적 풍토에 의하여 선생 자신의 풍모(風貌)와 서풍(書風)이 오히려 순수하게 간직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선생의 서예활동은 전라북도의 서화가 모임인 한묵회(韓墨會)를 창설하여 후진도 양성하고 전시회도 갖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주 한묵회의 50여 회원 모두가 수준급 들이었다.
서기 1945년 해방이 되고 뒤에 정부가 들어서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전주에 오셨을 때 도경찰국장 관사에서 대통령과도 만나 명필의 대접도 받았으며, 성재 김태석, 위창 오세창, 소정 변관식, 춘곡 고희동, 손재형,이당 김은호, 김기창,의제 허백연,청전 이상범, 강암 송성용, 심재 김건식, 석정 안종원, 위당 정인보, 우하 민형식, 영운 김용진 등 외에도 많은 서예 대가들과 친교와 시사(詩社)를 같이 하며 즉석휘호(直席揮豪)도 하였다.
선생이 1946년 3월 53살 때에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과 건국 이상을 현창(顯彰)함에 알맞은 조선서도예술을 확립함으로써 국가문화진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하는 전국 서예 대가 모임인 대동한묵회에도 참여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선생은 워낙 가난하였으되 언제나 가난을 낙으로 삼고 속화풍진을 멀리하고 명예나 지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정열과 겸허한 마음과 태도로 서예의 길만을 걸어왔으나 이 나라 서예 문화 발달에는 더 오래 있어야 할 나이인데도 서기 1956년 7월 25일 66세의 나이로 전주시 전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6세 되던 해에 진주 강공재명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병호,태호,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큰 아들 병호는 선생의 유묵을 정리하고 유묵첩을 내려 하고 있다.
3. 연도별 서예 활동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분에서 예서로 입선
성재 김태석 전서 대가에게 전서 사사
전국 서예대가들과 친교 정주권법과 기령당에 드나들며 친교 시사회 참여
1933년 광주에서 개인전
1934년 대구에 서 개인전
1935년 경향각지에서 전시적 전국 서화가들과 전주에서 박람회 한묵회 창설 후진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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