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남(宋鎭南)

  • 관리자
  • 2019.01.08
  • 1548
효심 강한 만능 선비 송 진 남 (宋鎭南) (1826년 ∼ 1904년)
 
* 자 : 혁여(赫汝)
* 호 : 소산(小山)
* 출생지: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서기 1826년 순조 26년에 김제군 성덕면 대목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여산 송씨 소윤공파 판결사공 휘 복(礪山宗氏少尹公派判決事公 諱 復)의 16세 손으로 휘 제공사경(諱題公思敬)의 현손(玄孫)이며 증 통훈사복시정 휘 흥철(贈 通訓司僕侍正諱興喆)의 증손(曾孫)으로 이름은 진남(鎭南)이며 자(字)는 혁여(赫汝)이고 호(號)는 소산(小山 )이 라 하였다.
증 가선 호참(贈嘉善 戶參)인 휘 수렴(諱秀癩) 아버지와 전주 이공동운(全州李公東雲)의 따님인 어머니 사이 2남 2녀 중 둘째 아들로태 어 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품(天品)이 온후(溫厚)하고 관인영민(寬仁英敏)하여 위로 할아버지와 엄(嚴)한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며 덕행(德行)을 읽히었다. 본시 학문을 좋아 하는지라 언제나 책에서 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문장, 문필(文章, 文筆)이 늘어 시부(詩賦)와 서도(書道)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白家書)까지 능(能)하였다. 또한 선비로써 행의(行儀)도 옳은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바른 것이 아니면 보려 하지도 않았다.더욱 아침 저녁으로는 위 어른들의 잠자리를 손수 보살피고 어디를 가고 오나 반드시 예로써 고(告)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사전에 여쭈어 승낙을 얻어 행하고, 집안 일이나 문우(文友)들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찾아가 원만히 풀어주며, 하나의 행동이나 움직임도 덕으로써 바르게 행하니 모두가 우러러보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생은 문장, 문필, 서도(文章, 文筆, 書道)를 잘 하였을 뿐 아니라 그 덕행과 효행심이 독실(篤實)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았다.
선생은 서기 1831년 순조 31년 신묘년(辛卯年)에 당당히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가선(嘉善)으로 돈령 도정(敦寧 都正)을 지내고, 그 이듬해인 서기 1832년 임진(壬辰)년에는 임금님의 연회석(宴會席)에도 참례(參禮)되어 후(厚)한 대접도 받았으며, 또 그 다음해인 계사(癸巳)년에는 다시 오르셔 가의대부 동돈령(嘉義大夫同敦寧)까지 지냈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에는 뜻이 없고 오직 지필습서(指筆習書)로 글이나 쓰고 글을 읽고 시(詩)나 읊으며 자여질(子與姪)들이나 가르치려 하였다.
선생은 입신(立身)이나 공명(功名)을 버리고 깨끗하고 건실하게 행동하며 조용하게 거처하며 수양하고 몸을 닦으며 글만을 썼다. 선생의 유고(遺稿)로는 병진 정월(丙辰正月)에 '소산 시집(小山詩集)', 정유년 봄에는 '가전세보(家傳世寶)'의 시집에 이어 병신년 봄에는 문집(文集)을 저술(著述)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동래 정공양원(東萊 鄭公良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고, 다음으로는 경주 김공두만(慶州 金公斗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서는 2남 2녀를 두었다- 그러다가 대소가(大小家) 형제(兄弟)들과 지필습서(指筆習書)하고 자녀와 조카들의 훈몽(訓蒙)에만 힘쓰다가 서기1904년 갑진(甲辰)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나 살던 동네 뒤에 장사(葬事)지내고 강암 송성용(剛菴宋成鎔)이 찬서(讚書)한 비(碑)가 서 있을 뿐이다.
김제시 요촌동에 사는 송순섭(朱順燮)은 선생의 증손(曾孫)이나 문집(文集)과 시집(詩集) 등 유품은 김제시 성덕면 소목리에 사는 6세손인 형용(亨鏞)이가 소장(所藏)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