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홍(鄭守弘)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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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의(忠·孝·義)로 선정을 베푼 정 수 홍(鄭守弘)
 
* 자 : 의백(毅伯)
* 호 : 풍천(楓川)

공의 이름은 수홍(守弘)이요, 자는 의백(毅伯)이며 동래 정씨이다.
고려 좌복사 목(高麗 左僕射 穆)의 후예로 증조부의 이름은 인인데 도지휘사대호군(都指揮使大護軍)이요, 조부의 이름은 승(昇)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받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가종(可宗)이니 예조판서를 지냈다. 어머니는 전주 최씨 문간공(文簡公) 철(哲)의 따님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읍의 수령을 역임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때 집의(執義), 대사간을 지냈고 세종 때 이조판서의 벼슬에 이른 문관으로 또한 대문장가(大文章家)이기도 하여 시호는 풍천공이다.
공은 일찍이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충·효·의에도 뛰어나 권근, 하윤, 성석진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공은 평생에 충·효·의가 투철하였으며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치정(治政)을 했다. 그 당시 문무관인 양촌 권근은 말하기를 "정공은 일기 충효의 기질로 인의의 학(學)을 밝혔다"라고 하였으며, 독곡 성석림, 호정 하윤공도 충·효·의를 평생 생활신조로 삼아온 정공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세종 때에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고 국방을 견고히 해야한다는 공의 상소문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또한 무주(茂朱) 적상사사고 정원일기(赤常寺史庫 政院日記)를 보면 공이 말년에 노재상(老宰相)의 몸으로 사직을 청원하는 마당에 당시 임금인 세종은 책상과 지팡이 또 부채에다 글귀를 써서 내려주어 노 재상의 건강을 염려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는 유명한 대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멋이 깃든 훈훈한 인정을 엿볼 수 있는 존귀한 글이라 할 수 있다.
공의 묘소는 김제군 금구면 목연동에 있으며 인근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고 추모하고자 완주군 구이면에 학천서원을 세우고, 또한 김제군 백산면 승방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매년 봄에 두 곳에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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