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신(溫 信)

  • 관리자
  • 2019.01.08
  • 1563
고려말 층신 온 신(溫 信)
 
공의 호는 수신재이며, 휘는 신(信)으로 봉성인(鳳城人)이다. 1366년 (고려 공민왕) 12월에 신돈의 농정을 극간하다가 금구 거야부곡(지금의 금산면 삼봉리 거야부락)으로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돈은 본래 계성현(지금의 창녕군)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에서 화부살이를 하던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절에 들어가 화부노룻을 하다가 개경(開京)에 올라오게 되어 김원명의 알선으로 공민왕을 뵙게 되었는데,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데다가 말솜씨가 또한 좋아서 공민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공민왕 14년부터는 신돈을 완전히 신임하여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까지 내리고 모든 국정을 신돈과 의논하여 결정함으로 해서 신돈에게 잘 보이기 전에는 아무 일도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돈은 높을 벼슬자리에 있었던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중신을 모함하여 내쫓고, 이춘부,김란 등 자기와 친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벼슬을 시키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나중에는 왕을 없애고 자기가 왕위를 노리는 흉계를 꾸미기에 이르자 대제학이있던 공은 우정언(正言)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좌의사(左議司)와 더불어 신돈을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밀직학(密直學) 이색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남으로 (금구 거야부곡) 내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자손들이 정착하였다.
그 뒤 1934년에 지방 각처 유림들이 공의 고결한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현사(四賢祠)를 창건하여 배향하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