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咸台永)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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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부통령 역임 한 애국지사 함 태 영(咸台永)(1873∼ 1964)
 
8.15해방과 더불어 건국이래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의 제 2대 심계원장(審計院長)과 제 3대 부통령을 역임한 함태영 선생은 1873년 (高宗10년) 김제군 진봉면 정당리에서 강릉 함씨 우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선대가 이 곳에 터를 잡은 것은 거의 300년 전 이씨조선 중엽으로 전해 진다.
원래 그 선조들은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던 관계로 남의 논과 밭을 얻어 경작하는 아주 빈곤한 가세로 삶을 꾸려 가는데 급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온 집안이 가난한 대신 재주들은 비범했다. 선생의 아버지 우택은 오히려 빈곤한 가세에 의지해서 생활을 꾸려 나가기 보다는 남의 집에 사숙을 꾸며 놓고 소년들에 서당을 치는가 하면, 그의 종횡무진한 많은 지식은 작명(作名), 관상(觀相)등으로 더 이름을 얻어 직접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풍수도참(風水圖讖)에도 능해서 그 근방 일대의 풍수인으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만큼 그 성가가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비상한 재주와 또 겸비된 인격은 그의 나이 겨우 20여세에 무과급제의 영광을 안게 되었으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런 수재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부전자전으로 머리가 명석하고 재주가 뛰어날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소년 태영은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의 초청으로 꾸며 놓은 사숙의 서당에 나가서 공부하는 동안 다른 아이들의 몇갑절 분량의 서책을 통독하고 어떠한 어려운 글에도 막힘이 없이 척척 해내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미 무과급제를 해놓은 선생의 아버지 우택은 등용의 날만을 꼬박꼬박 기다렸다. 이미 그 때부터는 김제 만경일대에서 그를 가리켜 학자와 풍수장이라는 이름을 떼어 버리고 함의관(咸議官)이라는 벼슬을 붙여 불렀다는 것이다. 의관은 바로 문과나 무과에 급제한 인재에 한해서만 부르는 관직명이었다. 함의관은 왕명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급제 이전에 삶의 수단으로 해왔던 모든 일을 그대로 계속해 나오는 여유와 아량을 지닌채 나날을 오직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해 왔다는 것이다.
0 애틋한 정이 담긴 고향 떠나
마침내 함의관은 1888년(高宗 25년) 조정으로부터 통정의관(通政議官)이라는 벼슬이 내려져 그 해 가을 한성부원으로 도임(到任)하라는 대명(大命)을 받았다. 이 때 선생은 나이 열다섯 살이었으므로 이미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이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았을 것이며 더욱이 2,3년을 두고 조모와 생모를 차례로 여읜 어린 가슴은 막상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에 만감이 교차 되었을 것도 물론이다.
만일 선생의 생모만 살아 있었어도 함의관은 아들 태영을 생소한 객지에 데리고 가느니 보다 차라리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살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그의 아버지의 벼슬길을 따라 한양으로 그 터전을 옮긴 것이다.
0 대한제국 최초의 검사
선생은 해방 후 우리 정부의 심계원장과 부통령을 지낸 외에도 구한말을 전후해서 중요한 관직을 맡은 인재중의 인재였다. 일제 36년동안 꾸준히 독립운동을 해 온 항일 투사였고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부터 기독교 운동에 가담한 종교인이기도 한 그는 대한제국 때에 한국 최초의 법관 양성소를 나와 구한국 최후의 왕권정치에서 최초의 판관이 된 사람으로 그 인물의 높은 비중을 말해 주고 있다.
1898년 그가 약관 25세에 법관이 되어 한성재판소의 판관의 중책을 맡았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훌륭한 지혜와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의 판관생활 가운데 가장 큰 역사적인 건은 독립협회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 세계 선진문명에 영합하려는 진보적인 청년들은 봉건과 사대주의에 가로막혔던 민족발전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한 발버둥이 한창이었고 그 민족적 전통의 집약으로서 독립협회 사건은 내외에 큰 파문을 던진 것이었다.
0 독립협회사건 무죄판결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이 관련된 이 사건은 소위 왕조정치를 망각하고 기존 질서를 부인하려는 개혁파라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재판의 법관이 바로 선생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 재판의 법관으로서 이들 개혁파 일당들에 무죄를 선고하고 방면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그가 세계적인 신진문명에 영합하려는 이들과 일맥상통한 것이 분명했고 이 판결로 인해 그가 판관의 자리에서 파직 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이승만과 교분이 두터웠다)
어떠한 조정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은 그의 소신있는 판결의 본보기이기도 하거니와 강직한 성격의 소신을 웅변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토록 법관으로도 이름 높았던 선생은 그 후 재등용 되어 대심원(대법원), 복심법원(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하다가 한일합방을 맞은 것이다. 선생의 철저한 민족적 주체의식, 애국관념이 이 매국적인 한일합방을 그대로 좌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o 3. 1운동 민족대표
모든 공직을 사퇴한 선생은 그 때부터 기독교에 귀의하여 종교운동을 통한 애국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그는 3. 1운동 때 장로로서 민족대표 48인의 하나로 전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그의 투철한 종교적인 신념으로 평양 신학교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코 졸업 1931년 목사가 되어 해방되기까지 꾸준히 종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o 심계원장 거쳐 3대 부통령 당선
해방 후 제 2대 심계원장(1949)과 제 3대 부통령(1952)으로 있을 때 선생은 고향땅을 찾았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난 후 처음 고향을 찾은 선생은 "고향처럼 다정하고 반가운 것은 없다" 고 70년만에 금의환향한 감격을 고향 친척들에게 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 청년들에게 "공부해서 시험쳐라. 정당리 사람들은 시험만 보면 떨어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소년 시절의 정당리를 회상하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오늘의 그가 되기까지는 꿈이 이룩된 전통의 마을이라는 뜻을 되새기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정당리에 있는 조촐한 야산 동성마루에는 3백 년동안 고향 땅을 지킨 선생의 무덤이 있고 성덕면 나시부락 앞 동남방간에 역시 자그마한 야산 등성이에 그의 생모의 묘가 있다. 일국의 부통령을 낳은 생모의 묘로서는 묘비 하나 서 있지 않는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기는 하나 이 묘는 선생의 선친 함의관이 유명한 풍수도참에 의해 직접 썼다는 묘로서 전무후무한 명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함의관은 아내를 그곳에 묻고 오면서 "막힐 데가 없는 명당으로 내 후대에는 큰 영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과연 선생이 3대 부통령으로 당선 되었을 때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나오는 이 말을 인용하여 부통령을 낳은 명당의 묘라는 추앙과 함께 그 묘를 다시 한 번 우러러보았다는 이야기 들이다.
선생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64년 9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국민장으로 고인의 영면(永眠)을 애도했다.
0 함태영 선생 출생지 비문
여기는 일제 때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 건국 후 제 3대 부통령을 지내신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태어나신 고장이다.
선생은 강릉 함씨(江陵 咸氏) 16세 손 흥달(興達)의 11대 손으로 1873년 (고종 10년)에 태어나 1896년 (고종 3년)에 대한제국 최초의 판관이 되어 한성재판소 판관으로 일하다가 한일합방으로 관직을 떠나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국가의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3. 1운동 때에는 장로로서 전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64년 타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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