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필달(趙必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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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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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淸白)한 장군 조 필 달(趙必達) (1600년 ∼ 1664년)
 
공은 고려 고종조(高宗祖) 무신(武臣) 조연벽(趙連壁)의 12세 손이며 문양공(文良公) 조간(趙簡)의 11세 손으로 본관을 김제(金堤)로 하여 1600년(宣祖 33년) 7월 7일 김제에서 태어났다.
본시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보기드문 청백리로 알려졌다.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필두로 벼슬길에 나가 순안현령(順安縣令)과 보성군수, 양주목사(揚州牧使) 등 외직을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과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등 무려 일흔 두 군데의 관직을 거쳤다.
공은 어느 자리에 있거나 국사(國事)를 공정히 처리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의 행장(行狀)을 듣고 임금이 시험해 보기 위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제수한 후 얼마 뒤에 파면시키고 암행어사를 보내어 그가 돌아오는 배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배 안에는 짚신 3켤레와 쌀 3되,군복 한 벌 장검(長劍)과 추(錐)가 각각 한개씩 뿐이라는 어사의 보고를 받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 (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 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또한 공은 송시열(宋時烈),유집 등과 더불어 북벌을 계획하고 전쟁준비를 서둘렀으나 효종(孝宗)이 별세하여 계획이 중단 되기도 했다.
후에 무신(武臣) 이완(李莞)이 퇴관함에 숙종임금이 "경의 후임으로 누가 적합하냐?"하고 물었는데, 이완이 대답하기를 "조필달이 참다운 세상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1664년(顯宗 5년) 공이 관직에 있으면서 별세하니 임금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부조를 후히 하도록 했으며, 예조정랑 박청(朴淸)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고, 고향으로 운구할 때에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공이 사용하던 호남 군사령기(軍使令旗)와 군복 한 벌이 동진농조 수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6. 조필달 장군 유물(趙必達 將軍 遺物)
지방유형문화재 제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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