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安 止)

  • 관리자
  • 2019.01.08
  • 1683
조선초(朝鮮初)의 청백리 안 지(安 止) (1377년∼1464년)
 
* : 자행(子行)
* 시 호 : 문정(文靖), 아호 : 고은(皐隱
)

공의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자는 자행(子行)이요,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고은(皐隱)은 아호이다. 공은 서기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태어나 서기 1464년(조선조 世祖 10년)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공은 타고난 용모가 빼어났으며 경학(經學)에 정려하여 일찍이 매헌(梅軒) 권우 선생의 문제(門第)로서 주역에 대통하여 기화(奇禍)의 수(數)를 확연하게 깨달았고, 그 문예(文藝)와 덕업이 일세에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현로(李賢老), 이 개(李塏) 등과 한글제정에도 동참하였으며, 정인지, 권식과 더불어 용비어천가 125장을 지었고,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과 같이 태조, 태종(太祖, 太宗) 왕조실록을 썼다. 세자(世子-후에 문종)의 부빈객(副賓客)이 되고, 1442년 (世宗 24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 사신으로 왕래하였으며, 1449년(世宗 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 영중추원사와 봉조 하를 역임하는 등 태종, 세종, 등 네 임금을 섬긴 중신(重臣)이었다. 공은 매사에 사려가 신중한 성품으로 한번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자신이 지은 자작시(自作詩)의 시평연(時評宴)을 베풀고 여러 중신들을 불러 시평을 의뢰하였는데, 다른 중신들은 안평대군에 아첨하여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유독 공은 그와는 달리 잘 된 것은 못 된 이라고 하고, 못 된 것은 잘 되었다고 하며 횡설수설하니 안평대군이 대노하여 망령이 들었다고 그 후부터는 상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그 후 안평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공은 매우 청백하였기에 비바람조차 피하기 어려운 집에 살았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그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까지 하게 된 청 백리였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지조가 강하였기로 세조(世祖)가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영월파천을 비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절친했던 귀래정(歸來亭) 신말주 등과 같이 낙향하였는데, 도중 신말주는 순창에 정착하고 공은 계속 남하하여 강진(康津)에서 그 후 10여 년을 동생 안일(安逸)과 같이 시가(詩歌)를 벗삼아 주유(周遊) 은거하였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그 후 공의 인재를 탐하여 누차 소명(召命)하여도 응하지 않으니 세조는 그 은거지 중심으로 용지, 백산, 금구면 일대를 사패장지(賜牌藏地)로 하사하고, 그 후 또 어의(御衣)까지 하사하여도 응하지 않으니 필경 세조는 김제군수에 공의 옛 제자를 기용 도임케 하고 그 군수로 하여금 공을 모시도록 했다. 도임한 군수는 공의 인품과 지조를 아는지라 매삭(每朔)마다 문안을 드렸는데 한번은 공이 군수를 방문코자 김제로 가는 길에 용지천 냇물을 맨발로 건넜다. 소식을 전해들은 군수가 민망히 여기고 그 용지 천에 화강석 재료로써 당세의 일품인 홍교(虹橋)를 놓아서 공을 위로하니 이 다리가 유명 한 고은교(皐隱橋)이다
.

평안도 안찰사를 지냈고 후에 예조판서를 증직했던 공의 친형 안기(安起)는 단종 영월파천 후 남하해서 김제군 용지면 평고리(平皐里),안촌(安村)마을에 은거중이었는데, 그 후 공이 이곳 평고에 와 합류하였다. 은거지인 평고를 따서 호를 형은 평촌(平村), 동생은 고은(皐隱)이라 하였다 한다
.

그 후 공은 88세의 고령으로 1464년(세조 10년)에 천수를 다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여 위로하였다. 그 묘소는 형 안기와 같이 김제군 용지면 예촌리 한절마을에 있다. 매년 음력 3월 4일 후손들이 시제를 모시며 선조의 얼이 깃든 고은교(皐隱橋)의 답교(踏橋)행사를 연례로 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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