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위(安 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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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 1686
임진란(壬辰亂) 때 수군(水軍)선봉장 안 위(安 衛)
 
선생의 자는 대훈(大勳)이요,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선생은 여러 대를 김제(金堤)에서 살던 경신(敬信)의 아들로 1563년(명종 18년) 김제 생건리(生巾里)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며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고 자라났지만 효성이 극진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기 위하여 호남에 내려와서 교장(校場)에 사열하고 있었는데, 금색(禁索)밖에 용모가 특이한 선생을 불러 본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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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년) 선생은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무고되어 용천(龍川)에 유배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려고 배소(配所)를 이탈한 죄목으로 형장을 막고 나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후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어느 병사(兵使) 막하(幕下)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영내의 질서가 서지 아니함을 보고 거듭 탈출한 선생은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인 이항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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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지난 날 보았던 선생의 용모를 선뜻 알아 차리고 "너는 죄에 묶여 있으니 막하에 둘 수는 없으나 공을 세운다면 변통할 길도 있다. "라고 영내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가 그 소문을 듣고, 탈영한 죄목을 들고나와 여러 번에 걸쳐 신변을 이송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항복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있던 차에 선생이 적진에 뛰어들어 6,7명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공을 세우게 되자 비로소 무과(武科)를 치르게 하여 등제(登第)된 후 군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래서 병조판서 이항복의 특천으로 대동찰방(大同察訪) 겸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는데, 1594년(선조 27년)에는 벼슬이 올라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3월 5일에 벌어진 당항포(唐項浦) 해전에서 적의 중선 한척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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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1597년 선조 30년)에 접어들자 왜적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그래서 그 해 7월 중순에 원균(元均)이 이끈 우리 함대는 칠천량(漆川梁) 앞 바다에서 하루 아침에 패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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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은 겨우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 끝에 정유년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남아 있던 전함은 원균이 칠천량 패전 당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이 미리 도망 칠 때 버리고 간 12척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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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도망친 수군을 정비할 겨를도 없이 12척의 빈약한 전함을 이끌고 정유년 9월 16일 새벽 명량(嗚梁 : 진도 벽파 앞바다)에서 적의 전선 1백 33척을 포착하게 되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의 전선 31척을 격침하고, 적장 10여 명을 위시하여 적병 백여 수를 베었으니 선봉장(先鋒將)에 나선 선생의 공이 제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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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으로 적은 서해안을 돌아 북상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으며 그 기세는 꺾인 상태에서 노량해전(露梁海戰)을 최후 발악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에도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한 빛나는 전공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고 1598년 정월에 통정(通政)에 오르고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가선(嘉善)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1600년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제수(除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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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에는 전라수사로 임명되었고, 1604년에는 가의(賈誼)에 올라 이듬해 1605년에는 충청병사(忠淸兵使)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1606년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다가 1608년에는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2년에는 유집(柳輯)의 사건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온(鄭蘊)의 간곡한 상소로 1619년 평안방어사(平安防禦使)로 임명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되자 다시 대장으로 등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時論)에 부딪쳐 향리에 돌아와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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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자 선생은 74세의 고령으로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북상하던 중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항화(降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에 향년 82세의 고령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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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친필과 동시에 무경칠서(武經七書), 공신록(功臣錄), 방어사27부교지(防禦使二十七符敎旨)를 하사하였으나 오늘에 전하고 있는 유품으로는 오직 하나인 병부(兵符)의 유서(諭書)로 송하영 故(宋河英:전주 풍남중)씨가 소장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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諭行慶尙左道水軍節度使 安 衛 卿受委-方體任非輕凡發兵應機安民制


敵-應常事自有舊章慮或有豫與卿獨斷置事非密符莫可施爲且意外姦謀不可


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故


煬押第二十七符卿其受之故諭


萬曆三十四年二月 二十一日


만력 34년은 선조 39년(1606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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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시민들은 김제시 백산면(白山面) 학당리(學堂里)에 학당서원을 세워 1794년(정조 18년) 갑인 9월에 선생과 웅치전쟁(熊峙戰爭)에서 수훈을 세우고 순절한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서원은 1869년(고종 6년)에 헐리었다가 1971년 김제읍 생건리(生巾里)에 중건되었다. 묘는 김제시 백산면 대산(垈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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