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도(柳棹)

  • 관리자
  • 2019.01.08
  • 1794
* : 용제(灌劑)
* 호 : 반곡(盤谷
)
* 출생지 : 지금의 김제시 신곡동


선생의 이름은 도(棹)요, 자는 용제(溶劑)이고, 호는 반곡(盤谷)으로 문화 류씨(文化 柳氏)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대승 차달(高麗 開國功臣 大丞車達)이다. 증조는 양보(陽輔)요, 조부는 덕신(德新) 이며, 아버지는 형조좌랑 태형(形曹佐郎 泰亨)으로 어머니는 김제 조씨(金堤 趙氏)이고 맏형은 당대의 거유(巨懦)로 이름높은 집(輯)이다. 서기 1604년(宣祖 37年甲辰)에 김제읍 신곡리(現 金堤市 新谷漏)에서 태어나 1663년 (縣宗 4年 癸卯)에 59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숙성(夙成)하였다. 맏형인 백석(白石)을 따라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주력하였다. 1633년(癸酉)에 생원(生員)에 급제하였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맏형인 백석과 뜻을 모아 결연히 일어났다. 선생은 "나라가 이같이 위태로워졌는데 신민(臣民)된 자가 자기의 목숨만을 아껴서 순국(殉國)하지 아니 한다면 나라에서 수백 년동안 양사(養士)한 대의가 과연 어디 있는가! " 라는 격문을 각 고을에 돌려 의병과 군량을 모으고 오랑캐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약하여 어쩔 수 없이 강화(講和)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대성통곡을 하고 되돌아와 모은 군량 백여 가마는 병영에 보냈다. 그 후 고향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1660년(효종 庚子)에 통선랑제용참봉(通善郎濟用參奉)에 임명되고, 1662년(효종 壬寅)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선생은 일체의 부귀영화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항상 남루하게 살았지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에는 앞장섰다. 어느 날 선생이 호산(壺山)을 지날 때였다. 한 선비가 여행하는 도중 주막에서 부모상을 거듭 당하고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길에 엎드려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선생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안타깝게 여기고 곧 자신의 밭을 팔아 선비에게 건네주어 선비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의로운 선행이 인근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일찍이 읽지 않은 책이 없었던 선생은 예학(禮學)이 정밀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법도(法度)가 있어 그 분야에서는 다른 사람이 따르기가 힘들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특히 기옹(畸翁), 정공(鄭公)과 용서(龍西), 윤공(尹公) 등과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선생의 유물로는 「유고집(遺稿集)」이 남아 있는데, 경서(經書)와 예문(禮問)을 강론했던 편지를 비롯하여 저술했던 많은 책이 어디론가 없어져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다. 선생은 1696년(숙종 丙子)에 백석서원(白石書院)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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