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형(杜萬馨)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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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만 형(杜萬馨)(1759년 ∼ 1817년)
 
* 자 경원(慶源)
* 호 : 초당(草堂)
* 출생지: 완주군 용진면 시사 천리

이름은 만형이며, 자는 경원, 호는 초당인데 정조임금이 지어 주신 사호(賜號)이다. 선생은 완주군 용진 면 시사 천리에서 서기 1759년에 아버지 흥사와 어머니 파주 염씨 사이에서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1792년 34살 때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 마을에 살다가 장전(長田)마을로 다시 이거하여 그 곳에서 1817년 12월 11일에 향년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총명하고 풍모가 빼어났으면 공부에 재주가 있어 향리(鄕里)의 유생들의 추천으로 서울 성균관에서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다.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은 정조 임금께 알려져 정조임금은 친히 그를 불러 어전시재(御前試才)를 하였다. 한3각(1각은 15분)에 「불매청금약」이라는 부(賦)로서 글을 지으니 일백구(壹百句)를 거침없이 지어 바치는지라 임금님이 찬탄하여 친히 손을 잡으며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과연 가위금지초당(可謂今之草堂)이라 하시며 초당(草堂)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고 병, 필, 연, 묵(屛筆硯墨)을 하사하였는가 하면 고부 땅에 전답 구백제(國畓九惰堤)를 내려 주고 치하했다. 선생을 임금께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에 비유하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고 심취하였다. 그 후에도 정조임금께서는 친히 불러 귀히 여기고 각종 하사품을 주셨으니 그 글의 솜씨는 문학가의 경지에 다다랐으며 세상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하사품인 경림문희록과 은배 시집 두 권 도합 3권을 선생의 유고 시집과 함께 선생의 5세 손인 두팔성(株八星)옹이 금구면 옥성리 사동 마을에 살면서 가보로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선생은 천부적인 시재(詩才) 뿐만 아니라 실학 사상에 의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다. 선생의 유명한 어전 상소문 10장을 보면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말년에 금산면 용호리 장전마을에서 스스로 초당을 짓고 임간(林間)에서 산수(山水)를 벗삼아 시를 지으며 살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 분의 후손과 선생의 학덕을 숭모(崇慕)하는 후인들이 정조임금의 하사품을 길이 보존키 위해 선생이 말년에 생활한 장전마을에 어필각을 건립하고 하사품을 보존해 오다가, 6. 25동란 중에 그 흔적조차 없어지고 병풍과 필, 묵, 연도 유실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선생의 시집(詩集)인 '화조소(流鳥美)' 두 권과 하사품 서책 3권이 보존되어 있음은 천만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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