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용(宋守鏞)

  • 관리자
  • 2019.01.08
  • 1927
시인이며 한의사 송 수 용(宋守鏞) (1906년∼1946년)
 
* : 정보(正甫∼8점을 남겼는데, 이것은 장남인 아산 송하영이 소장하고, 「모자사」라는 목각 현판은 2남인 미산(未山) 송하선(宋何璇)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 호 : 소정(詔庭
)
* 출생지 :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


선생은 여산 송씨 소윤공파 판결사복(復)의 21세 손으로서 한국 서예 사의 큰 맥을 이루었던 유제 송기면(宋基冕)과 어머니 예안(禮安) 김씨 사이에서 난 4남 1녀 중 장남으로 1906년(丙午) 8월 27일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바르고 아담하였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그래서 5세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5세때 까지 글과 글씨 그리고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행(德行)을 고루 익혔다. 그리고나서 16세 되던 해에는 유학의 대가인 간제 전 선생(艮齋 田 先生) 문하에 들어가 서예와 한학 공부에 열중하여 문장가로 문필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들은 선생을「한묵사치(翰墨詞致)가 유족동인야(有動人也)」라고 평하였으며, 스승인 간제 선생도 저심순리(低心順理)의 요지인 단편문을 손수 써 주며 칭찬하였다. 선생은 나이 18세 때 병을 얻었다. 그래서 심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약수(藥水)가 나온다는 명승고적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하였는데, 그 때 가업(家業)으로 경영하여 오던 한의학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직접 강습을 받아 뒷날 한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선생의 인품과 문필에 탄복한 전남 영암(靈巖)지방의 토박이 던 이원우(李元雨)가 선생을 초빙하여 자식들에게 학문과 필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간청을 못 이긴 선생은 한동안 이원우 집에서 지냈는데, 그 때의 심사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

「客窓無奈送殘奈 同首比天恨更新 舊社芳槍能畿處 異鄕今日未歸人


殘范雨後空山路 芳草煙深淺水濱 此去東風好何借 -時吹送世問麗」


( 객창에서 할 일 없이 이 봄을 또 보내며, 북쪽 하늘 바라보니 한이 다시 새롭구나
.
구사의 꽃다운 시절은 그 얼마던가. 이향에저 방황하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여
.
아직 남은 끝은 산 길가에 애처로이 피고, 방초는 개울가에 우거졌도다
.
누가 능히 동풍을 빌어서, 세간의 진 애를 다 쓸어 볼 것인가
.)

객지에서의 애틋한 심사를 참으로 잘 나타낸 시다. 그 후 선생은 한의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학문과 서예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수신과 극기의 정신으로 흐트러짐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일제하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내 머리를 자르거나 창씨개명(創氏改名)하지 않고 옳고 곧은 정신으로 살았다. 전주 최씨 규화(圭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두고 인술을 베풀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1946년 8월 5일 41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은 여러 편의 한시(漢詩)와 금일급무(今日急務), 온고지신(溫故知新)등 여러 편의 산문, 그리고 호남한국화 백 년 전에서 시선을 집중시켰던 「유어도(遊魚圖)」 등 한국화 7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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