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용(宋大鏞)

  • 관리자
  • 2019.01.08
  • 1923
팔방미인(八方美人) 송 대 용(宋大) (1904년∼ 1943년)
 
* :아제(雅齋)
* 출생지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


선생은 여산 송씨 소윤공파 판결 사복(復)의 21세 손으로써 아버지 기헌과 어머니 이천 서씨(利川 徐氏)사이에서 난 1남 3녀 중 장남으로 1904년 11월 5일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품성이 소박하면서도 강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남보다 총명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박학다식(薄學多識)하고 엄하신 백부(伯父) 석천 문하에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석천의 학문을 그대로 이어받아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달하고, 문장과 시(詩)와 서도(書道)가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특히 시부(詩賦)에는 더욱 능하여 15살이 되던 4월 26일에는 한시(漢詩) 460여 수를 가려 모아 시집(詩集)으로 남기는 등 앞날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고대로부터 변함없이 이어 온 한학(漢學)보다는 새로운 신문명이 추구하는 현실적, 대중적인 문학을 익혀야겠다고 결심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후 스승이며 백부인 석천 선생에게 허락을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 길로 돌아온 선생은 굵은 회초리 한 묶음을 꺾어 들고 토방 아래에 엎드려 먹고 마시지도 않으며 수일간을 빌어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선생은 바로 각지에 주문서를 보내 책을 구입하고 혼자서 수 년동안 신문학(新文學)을 깨우쳤다. 이 때 김제군수 이종소씨가 함께 군의 일을 하자고 청하여 이를 허락하고 관리(官吏)로써 김제 서부지역의 개답(開畓)과 간척에 관한 사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글벗들이며 지사(志士)들과 가까이 하면서 시(詩)를 짓고 글씨를 썼다. 일 제시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피하지 못했던 창씨개명(劍氏改名)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한복을 즐겨 입었다. 그러자 경찰서에서 불평, 불만을 품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조선사람이라고 소환하였다. 이에 선생은 조상 때부터 지켜온 고유의 성과 이름을 바꿀 수 없다며 만약 강요하면 조상에게 죄가 되기 전에 사임하겠으니 마음대로 하라 하고 끝까지 버티니 그 꿋꿋한 절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선생은 악보도 없이 불러져 내려온 아악에도 탁월한 재능이 많아 시조창(時調唱)에 있어서는 가곡 가사, 편편락(編編樂)까지 국내 정상의 명인으로 활동했으며 많은 후진도 배출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한학(漢學), 신문학(新文學), 문장(文章), 서도(書道), 아악(雅樂)까지 능했던 팔방미인(八方美人)의 선비였는데, 안타깝게도 1943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2남인 상강 송택성이 시집과 서첩, 아악보 등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