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곤(鄭 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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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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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편찬에 힘쓴 정 곤(鄭 坤)
 
공의 호는 복재이며 동래 정씨이다. 그 선조 목(穆)은 벼슬이 고려조 상서 좌복사(尙書 左僕街)에 이르렀고, 그의 네 아들은 제, 점, 택, 항(濟, 漸, 澤, 沆)인데 모두 문과 벼슬하여 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었다. 셋째인 택은 찬선 대부(贊善大夫)로 고려조 5백년에 뛰어났고 그 아래로도 줄곧 빛나는 벼슬에 올랐다. 증조부의 이름은 인(細)인데 고려조 도지휘사대호군(高麗朝 都指揮使大護軍)이요, 조부의 이름은 섬(暹)으로 이조판서요, 아버지의 이름은 흥사(興綱)로 예조판서요, 부인은 전주 이씨다. 공의 모습은 빼어나고 밝으며 행실이 뛰어나 어릴 적부터 어른과 같았다. 유교에 뜻을 두고 목은 선생(牧隱 先生)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미 깊은 이치를 이어받고 스스로 오묘한 길을 찾아 마침내 큰 선비가 되니 도덕과 문장이 일세에 두드러졌다. 세종 임금 시절에 그 맑은 기품이 드러나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堤學) 성균관 대사성지제교(成均館 大司成知製敎)에 이르렀다. 세종이 그 맑고 곧음을 기특히 여겨 복재라는 호를 내렸다. 국상(國相)인 조준 봉과 왕의 명으로 고려사를 닦을 제 국상 정인지와 서로 의논하며 편찬에 많은 공을 쌓았다. 정통연간(正統年間 1436∼1449년)에 벼슬을 내놓고 벽골(碧骨 =金堤地方) 시골집으로 물러나 연촌 최공(煙村 崔公)과 덕으로 사귀고 의리로써 글을 교환할 제 묻고 이야기한 이치가 분명하고 정밀한지라 한 두루마리의 시(詩)가 있으며 후배를 이끌어 도와서 성취시켰다. 선생의 묘소는 백구면 사랑 절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 노씨(光山 盧氏)로 국상 숭(崇)의 딸이다. 부인의 묘소는 승가산(僧伽山) 예조판서공의 묘 아래에 있다. 공은 덕과 좋은 글로써 좋은 임금을 만나 일찍이 세상에 나섰다면 나라에서의 일과 후배를 위한 공(功)이 많았을 것이다. 후배에 전할 만한 문자도 많았으련만 병란의 탓으로 집에 보장했던 글들이 거의 흩어졌고 본 것이 얕고 아는 것이 엷어 국사와 외사를 자세히 고찰할 수가 없었다. 인근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고 추모하고자 완주군 구이면(完州郡 九耳面)에 학천서원(鶴川書院)을 세우고, 또한 김제시 흥사동에 승방서원(承芳書院)을 세워 배향하다 매년 봄에 두 곳에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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