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직(李定稷)

  • 관리자
  • 2019.01.08
  • 2648
근제 실학의 대가 이 정 직(李定稷) (1841 ∼1911)
 
* : 형오(馨五)
* 호 : 석정(石亭
)
* 출생지: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


선생의 자(字)는 형오(馨五)요, 석정(石亭)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신평인데, 고려조 평장사문간공(平章事文簡公) 덕명(德明)을 비조(鼻祖)로 하고 이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 상원의 후예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살다가 조선 말엽에 무관을 지낸 계환(聲煥)이 시국의 참상을 보고 김제에 이거하였다. 선생은 1841년 지금의 김제시에서 익산행 도로를 타고 8km쯤 거리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2km쯤 들어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일명: 역구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으며 근세 한국 유학의 거목으로 또 구한말 성리학자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 고장 김제 출신으로 그의 높았던 학문은 후에 이 고장 금만 경들에 새로운 학풍과 학통(學統)을 크게 형성했던 대 학자로써 선생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선생의 영향력은 후학들에 계승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생애와 학업


선생은 1841년(현종 7년)에 지금의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4세엔 천자문을 읽었는데 하루에 수백 자씩 외울 수 있었다는 것이며, 5세에 당시의 주화인 엽전을 한 눈에 보고 그대로 지면에 묘사하였는데 원본과 다른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 사람들은 공을 신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생의 아버지 이사과(李司果)는 석정과 같이 지혜가 일찍 드러난 아이에게 너무 일찍부터 머리를 쓰게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9세에 이르러서야 서숙(書熟)에 입학시켰다. 선생은 그 해에 통감(通鑑) 15책을 완독하였다고 하며, 10세 되던 해 아버지께서 친히 주시는 맹자 7권을 그대로 모두 읽고, 다음해에는 논어를 완독하였다. 선생의 아버지는 남달리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엄숙한 지도를 하셨다. 재주가 뛰어난 아들이 잘못하면 오만무중(傲慢無中)한데로 흐를까 염려하여 언제나 인격적인 면에서 아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 석정이 열두 살이 되자 당시 역학(易學)에 뛰어난 태인 의 강회민 문하에 보내어 역학에 대한 기초이론을 해득시킨 후 그 이듬해에는 금구의 안정 봉에게 보내어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선생은 여기에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산학(算學), 예학(藝學)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을 두루 익혔으며 실학사상에 눈 뜬 것도 바로 이 때인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한편으로 시문(詩文) 공부에도 충실하면서 술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는데, 이 때쯤에는 가세가 어려워 조반석죽으로 끼니를 연명해야 할 처지였으나 학업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선생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20대의 약관에 이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공의 문장력과 재명(才名)은 경향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연경 유학과 동서사상 접목


선생이 27세에 관직이 없는 야인으로서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게 된 것만 보아도 이 때에 벌써 그의 재주와 학식이 조정에까지 알려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사신을 수행한 선생은 연경에 도착해서 동서양의 문물을 보고 새로운 식견을 얻어 동서사상을 절충하는 새로운 학문의 길이 전개되었다. 선생은 연경에 머무는 동안 교포서점을 통하여 동서양의 백가서(百家書)를 얻어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식을 과시할 수 있었던 선생은 여기에 머무는 1년동안에 보다 넓고 치밀한 학문의 세계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연경에 머무는 동안 중국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평론, 중국 성리학에 있어서의 정주학(程朱學)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해설과 논평, 그리고 칸트, 베이컨 등 서양철학에 대한 연수와 동서철학의 절충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연구하여 얻은 성과를 '연석산방미정고', '문고', '시고' 등 25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

· 청렴결백한 향촌생활


중국에서 돌아온 선생은 양친을 모시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공양이 극진하여 효자소리를 들었으나, 빈곤함을 벗어나지 못해 부모가 별세했을 때 상례가 여의치 못하였다. 뒤에 선생은 전주에서 몇해동안 매약(賣藥)을 하여 얻어진 재력으로 부모의 장사를 뜻대로 치렀다. 전주에서의 갑오병란으로 재산을 모두 소실 당하자 선생은 성장지인 김제 요교에 돌아와서 찾아드는 사람들과 학문을 강론하며 소실된 원고의 재정리 등에 몰두하였다. 선생의 투철한 성리학의 이론도 이 때에 닦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선생의 생활은 말할 수도 없이 곤궁하였다. 전언에 의하면 선생은 10년동안 간장을 담그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곤궁한 생활을 돕기 위하여 자금을 대어줄 터이니 약상(藥商)을 재기하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는 이에 말하기를 지난날의 매약(賣藥)은 부모의 상례 사를 위하여 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으며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명분이 가난뿐인데 이를 어기고 재산을 모으기 위한 약상을 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아무리 궁색하여도 서화를 파는 일은 없었고, 선생은 혹 타인의 시문을 대작하여 주는 일도 있었지만 그 본고는 반드시 소각하였다. 선생은 어떠한 관직을 준다 해도 초연하게 사절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의학에도 조예가 있어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가 처방을 가르쳐 주고 치료법을 지도하여 주는 성품이었지만 돈을 벌기 위한 의술은 생각지 않았다. 그는 지식을 양식으로 삼고 학술의 강론을 낙으로 삼을 뿐이었다.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인자한 정이 넘쳤다. 자기 주관이 확립되면 절대로 동요하는 일이 없었고,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지친지엄(至親至嚴)한 사이에서도 따르지 않았다. 선생은 모든 사람을 인자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사납기로 이름난 사람이라도 선생이 온순한 말로 풀어 주면 스스로 감복하여 당장 착하게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초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언제나 명랑한 표정이었으니 선생이 이르는 곳에는 가정이나 사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숙연하면서 평화로웠다. 선생이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인 면에서 절 세의 자격을 갖추었으면서도 이러한 재목이 당시에 쓰여지지 않고 드러 나지 않았음은 다름 아닌 원래 청한정정(淸寒淨淨)하여 당시와 같은 혼탁한 사회에 성명을 드러 내기가 싫었던 것이요, 그 시대와 그 인물이 서로 맞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었다
.

· 학문적 위치


19세기 중엽 선생이 출세할 때 우리 나라의 정세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말할 수 없이 퇴폐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침입한 외세는 정치 사상의 양면에서 침식의 야욕이 발동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국내의 정치계는 외세의 봉쇄를 주장하는 쇄국주의와 외세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개화주의가 대립하게 되었다. 학계에서도 서학을 반대하는 보수파와 서학의 수용을 주장하는 신진 파의 2대 조류가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수파는 전통적인 재래문학에만 집착하고 양학을 부정한 것으로 보아 이를 배척하는 이른바 도학자적인 문류를 말하는 것이다. 신진 파는 서학의 과학적인 개화를 인정하고 시대의 진보에 따라서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과학적 문류라고 할 수 있다. 이 도학자적인 문류를 다시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도학 이외에는 어떤 학문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순수 도학자가 있는가 하면, 그 다른 하나는 도학을 중시하면서도 여기에 서학의 과학적인 면을 도입하여 동서 신구 학의 조화를 주장하는 절충주의 적인 학자이다. 이에 반하여 과학적인 문류에 있어서도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과학적인 서양학을 대강으로 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인 서학을 바탕으로 여기에 동학적인 도학을 조화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학을 바탕으로 여기에 서양의 과학을 조화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첫째는 극히 적은 편이었으며 둘째와 셋째 유형이 많은 편이었다. 신진 파의 둘째와 셋째의 유형은 앞의 도학과의 분류에서 도학과 과학의 조화를 주장하는 절충 파와 마찬가지로 그냥 절충 파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순수 도학적인 문류는 성리학의 이론과 예학의 형식론을 골자로 하는 공리학적인 경향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절충 파의 내용에는 정치, 경제, 문학, 도학,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실학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 무렵 전라도의 학계는 전주에서 태어난 간재 전우 선생이 조선 유학의 마지막 종장으로 순수 도학 파의 문류를 형성하여 당대를 풍미하고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김제에서 태어난 석정과 만경에서 태어난 해학이기, 그리고 구례에서 태어난 매천 황현 등은 도학과 과학의 절충조화를 주장하면서 신진 파의 문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간재 전우 선생은 당시 자기의 문류에 2천여의 제자를 두고 국가의 은일천관(隱違薦官)까지 받았다. 그런가 하면 해학이기는 과학을 근간으로 하여 여기에 도학을 조화하려는 학풍이었으며, 석정과 매천 황현은 전통적인 도학의 기초 위에 새로운 과학을 조화하려는 학풍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해학, 석정, 매천의 3인은 모두가 전통적인 도학을 존중하면서도 종래의 도학처럼 공리공론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굴레에서 벗어나 도학이 과학과 더불어 이용후생에 실용화 될 수 있는 실학으로서 전개시켰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시문학, 어문학, 경학, 영상학, 술학, 예학, 산학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학(理學)은 비교적 뒤늦게 정리된 것인데 선생의 저서 '연석산방미정문고'에 이것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선생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실용을 위한 것이다. 이론적 지식보다는 실용을 중시한 점은 전북 실학의 문류를 개척한 공적이 지대함에 틀림없다.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시문학에 있어서는 '시경주해', '시학','증해', '소여록', '간 오정선', '소시주선' 등등이며 성리학에서는 '연석산방미정문고'가 있고, 이 밖에는 '어음학', '천역학', '술수학'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시문'의 일부를 간추려 '석정집' 3권이 현재 전하고 있다
.

· 저서와 미술세계


그 당시 호남지방에서는 선생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사사 받아 양성되었다 하거니와 석정 선생의 고매한 시문, 서, 화 및 실학사상을 그대로 전수 받은 제자는 다음과 같다. 유재 송기면, 학상 정우칭, 벽하 조주승, 소강 송헌호, 이당 조병헌, 석전 김연호, 이운 나갑순, 오당 강동회, 설송 최규상, 유하 류영완, 학헌 최승현, 정로식, 정한조, 곽탁 등의 문장과 명필 또는 선진 신학문으로 진출한 제자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선생이 서거한 후로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영향력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문학으로는 구한말 우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최고 경지에 도달한 문학 집이 서술되었다. 이는 다름 아닌 서구문학의 철학자 '칸트'와 '베이컨'철학을 한국의 유학자로는 최초로 유입해다가 동양철학의 주자학과 비교 분석해가며 석정 자기 나름의 철학을 펼쳐냄으로써 동서문학의 가교 역을 다하였던 것으로 우리 유학 계에서는 선진 서구문학을 가장 선구적인데서 수용한 창시 적인 대문호이기에 지난 1973년 5월 29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던 고 박종홍 문학박사가 한국사 연구발표회에서 이에 대한 강연이 있어 세인의 관심사로 집중되었다. '연석산방미정고' 30여 권의 유고가 있다. 그 내용을 대략 간추려 보면 <칸트>와 <베이컨>철학에 관한 별집이 있으며 <칸트>를 (康德),<베이컨>을 (倍根)이라고 한자로 각각 표기해 놓았다. 그 외에도 '문시고'를 위시하여 성리학, 시학, 천역, 산수, 의약, 율여, 지리, 시경, 주해, 산학전수, 시학증해, 간온정선, 소시주선, 자음고전사 활역, 성당정음, 소여록 등의 저서가 있다. 서법으로는 구양순체의 해서, 행서에 있어서는 미비와 동기창체, 비갈 명에 있어서는 안진경체를 각각 택하여 많이 썼는데, 선생의 특징으로는 해서와 세서라고 전한다. 화법에 있어서는 순수묵화만으로 사군자를 비롯하여 괴석, 산수화, 수목, 조류, 어류 화에 이르기까지 못 다한 묵화가 없었다. 그 각양 각색 다양하게 그린 작품 중에서도 괴석화가 가장 특이하다는 것이며 경향간에 선생이 남긴 서화에는 고아한 필치, 유쇄한 필묘, 그리고 조화된 수묵의 용법 등은 별로 따를 자가 없다 하겠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박학통문(博學通文)하고 무불통달(無不通達)한 학문을 남기신 선생은 서기 1911년 김제시 백산면 상정 리에서 향년 70세로 타계하시니, 선생의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 있는 선생의 생가가 1974년 9월에 지방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뒤 1981년 겨울에 관계당국에서 옛 모습대로 복원 수리해 선생을 추모하고 후세에 선생의 뜻이 전해질 교육장으로 보존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