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현(崔世鉉)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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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문인 최 세 현(崔世鉉) (1866년-1940년)
 
* : 학담(鶴潭)
* 출생지 :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1. 일생

선생은 고려말 두문봉의 후예로서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는 농촌의 한 선비의 가문에서 차남으로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서기 1866년(고종 3년 병인 2月 10日)에 태어났다. 선생의 이름은 세현이요, 호는 학담으로 전주 최씨이다. 충익공 만육 선생의 16세 손이며, 야암 최승묵의 손자이고, 농와 최광악은 선생의 증조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4년간 부모시묘에 건강을 잃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던 죽돈 최기방이며 어머니는 순창 출신 울산 김씨이다. 시문과 풍류를 벗삼아 평생을 살다간 조부님의 취향에 따라 송죽으로 아름답게 가꿔진 수천 평의 후원과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머루, 다래가 철따라 탐스럽게 익어 가는 널따란 정원에서 선생의 어린 시절은 낭만과 시정이 넘치는 요람의 성장기였다. 선생은 조부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배워 익혀 7, 8세에 이미 시작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3, 14세에 이르러서는 경서를 익히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16세에 인동 장씨 장계수의 3녀와 결혼을 한 선생은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선생의 학문은 20대에 무르익어 향리의 선배들로부터 학자로서의 예우를 받았으며 사랑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의 학덕이 널리 알려지자 각지로부터 제자들이 모여들어 주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니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선생이 살던 집을 가리켜 선당집이라 부르고 있다. 불고가사하고 학문토론과 시문으로 세월을 보내다보니 얼마 되지 않은 살림은 바닥이 나서 중년 이후 선생의 가정생활은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하루는 선생을 찾아온 제자들과 사랑에서 학문을 논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밥상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밥상을 받아 밥그릇을 열어보니 밥은 없고 개 덮은 놋그릇 안에 뜨거운 물만 담겨져 있는지라 제자들도 할 수 없이 한 그릇씩 들고서 귀가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쌀과 돈을 가지고 와서 선생댁에 드렸다는 이야기는 촌로들의 입에서 전해지고 있다
.

2. 사상


선생의 배일사상은 신앙보다 무서웠다. 선생의 장남은 일찍이 요절하였고 차남이 선생을 모시고 사는데 차남의 아들 즉 선생의 장손이 사내로서 머리를 길게 딴 채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있었다. 개화에 눈을 뜬 선생의 차남은 자기의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몰래 단발을 시켜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이것을 알게 된 선생은 자기의 손자가 왜인 밑에서 왜나라 글을 배운다는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아들 며느리는 물론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손자까지 자기 집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아들 며느리가 사죄하여도 선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대노하며 단호한 자세로 일관하니 어쩔 수 없이 아들 며느리는 끝내 쫓겨났고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영영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철저한 배일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의 배일사상은 그것 뿐이 아니다. 선생의 바로 이웃에 살았으며 선생이 가장 총애하던 제자가 독립투사 이종희 장군이다. 이종희 장군은 키가 6척이 넘는 장골풍으로서 의협심이 강한 대장부였다.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데 보다 출중 하였으므로 선생은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귀여워했다. 그런데 그가 성장한 후 한때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들어 잠시 타락의 길로 빠져들자 누구보다도 선생의 실망은 참으로 컸다. 하루는 이종희 장군을 선생의 서재에 불러다 놓고 준엄하게 꾸짖었다.「나라가 왜놈에게 짓밟혀 이 모양 이 꼴인데 너와 같은 인재들이 대오 각성하여 구국운동을 하지 않고 취생몽사를 한다면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이냐?」라고 통탄을 하자 이종희 장군은 선생의 무릎에 엎드려 통곡하여 회개하는지라 사제가 함께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이종희 장군은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선생을 찾아와 주위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며 밤이면 밤늦게까지 깊은 대화가 오고간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희 장군은 결연한 각오로 나라를 찾기 위한 망명의 길을 떠났으니 그 분이 바로 중국에서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면서 전라도 대표로 활동하였고 광복군 제1지대 장을 지내다가 광복군 사령부 고급참모를 역임한 분이다. 이종희 장군이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집에 두고 떠난 후 그 유족에 대한 왜경의 탄압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었고, 선생에 대한 사찰의 눈길도 항상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해방은 찾아왔지만 선생이 아끼고 기다리던 제자 이종희 장군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46년 3월 28일 귀국선상에서 발병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고, 선생은 역시 같은 해 8월 18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사제의 한을 상봉해 면치 못한 채 두 분이 다 타계하였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

3. 생활상


선생의 생활은 절제와 검소로 일관하였고 청빈스럽기 그지없었다. 선생은 자기 부모가 돌아가신 뒤부터 평생동안 일식일채주의의 식생활을 실천하였다. 언제나 한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드는 선생에게 주위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은즉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첫째, 노부모를 마음껏 봉양치 못한 불효의 죄요
,

둘째, 나라를 뺏긴 백성으로서 한 가지 반찬마저도 송구스럽다는 것이다
.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선생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너무도 많았다. 선생의 거처하는 집 모퉁이에는 언제나 주워 모아진 나무토막과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먼길이건 가까운 길이건 집 문을 나갔다는 돌아오는 길에는 마을 주변에 버려진 나무토막이나 나뭇가지를 작고 크고 간에 손에 몇 개씩 주워다가 모았다는 것이다. 1년동안 모으면 그것이 짐으로 쌓이며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에는 세 집 며느리들을 불러다 세워 놓고 "첫째, 길가에 버려진 것을 주우니 마을 주변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좋고, 둘째, 적은 것도 날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모으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와 같이  땔감이 되는 것이다." 라고 산 교육을 시키고서 섣달 그믐날 떡칠 나무로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선생 가문의 뜨거운 교훈으로 남아 있다. 선생의 나이 60대에 이르리니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 사생 계를 만들었다. 매년 음력 10월 5일이면 150여 명의 문인들이 모여 1년동안 각자가 지은 시문을 발표하는 학문의 광장이 되었으니 김제시는 물론이요, 호남일대에서 모여든 선비들의 당당한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사는 1935년부터 시작하여 일제 말기에는 일경의 갖은 구실과 방해로 온갖 시련을 겪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계속하니 일본 형사들이 직접 참여하여 종일토록 입회 감시하였다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선비들의 울분과 일제에 대한 증오의 분노가 그 날 따라 더욱 충천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가 거듭 할수록 문인들의 모임은 늘어만 갔으니 2백여 명의 사생 계원들은 선생의 사후에도 계속하여 모임을 갖다가 6. 25동란으로 중단된 채 오늘에 이르렀고, 백의도포에 갓을 쓰고 일제의 총칼 앞에 붓으로 대결하던 당시의 2백여 사생계원 선비들이 지금은 한 분도 생존해 있는 분이 없다니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선생의 향리 구미마을 뒷산 울창한 송죽은 옛 추억을 말해 주는 듯 오늘 따라 더욱 푸르고 선생의 생전에 거쳐 하던 사랑은 헐어 없어진채 남은 집에서 선생의 3남 월계 최영직 선생이 노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선생의 유고집 5권과 기타 문집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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