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우(羅仲佑)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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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高麗末)의 충절
나 중 우(羅仲佑)
 
○ 본 관 :나주(羅州)
○ 호 :낙천와(樂天窩
)

어릴적부터 천성이 곱고 강직했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던 공은 능히 천하를 다스릴만한 재주와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

1362년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 공이 문과(文科)에 급제한지 얼마 안되어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자 공민왕은 정치와 민간의 이해득실을 사실대로 아뢰게 하는 한편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을 시관(詩官)에 임명하여 과거를 치러 인재(人材)를 뽑게 하였다. 거기서 33명의 뛰어난 선비가 뽑혔는데, 그 가운데 공은 병과(丙科)16번째로 급제하였다. 그 후 전교시령 겸 춘추관편수관(典校侍令 兼 春秋館編修官)을 거쳐 예문관 지제고(藝文館 知製誥)에 이르렀다
.

1367년 공민왕(恭慾王 16년) 왕이 학교(學校)가 황폐해 짐을 근심하고 이를 다시 일으킬 생각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索)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기용하여 생원(生員)의 수를 늘리고 포은 정몽주와 자은 이숭인(暇匈隱 李崇仁)을 다른 관직에서 교관(敎官)을 겸하여 가르치도록 했는데, 공도 경서(經書)에 밝다 하여 교관(敎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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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날마다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명륜당(明倫堂)에서 경서(經書)를 나누어 가르치니, 학도가 모여들어 배웠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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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恭讓王 六年)에 관(館)과 사(寺)가 궁밖에 있음을 타당치 않다고 생각한 공은"예문관은 사명(詞命 :왕의말과 명령)을 맡은 곳이요, 춘추관(春秋官)은 기사(記事)를 맡은 곳이며, 전교(典校)는 사전(祀典)을 맡아 축문(祝文)을 쓰는 곳이니, 이 삼자(三者)가 중사입니다. 그래서 선왕은 관을 궁중(宮中)에 두었는데, 지금은 관과사가 밖에 있어 선왕의 제도에 어긋났으니, 지금부터 사관(事官), 한림(輪林) 2인과 전교 1인을 궁내(官內)에 들어와 근무케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하고 공양왕에게 상소하였다. 공양왕은 사리에 밝은 공을 크게 칭찬하고 공의 청대로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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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의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차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무렵이었다. 이성계가 힘없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러자 공은 벼슬을 내던지고 김제군 입천면 내호리(金堤郡 立川面內弧里-현재 김제시 신풍동 내기 「안터」)로 내려와 나라 잃은 설움을 씹으며 묻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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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공의 사람됨을 잘 아는 이성계가 세 번이나 우의정(右議政)을제수하고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면서 자손들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는 법이 아니라고 힘주어 가르치면서 지제고(知諸誥)나 신주(神主)에도 그렇게 쓰라고 이르고 어떤 경우에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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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이 세상을 떠나자 태조(太祖) 이성계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부조를 전하면서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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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42번지에 있고, 공이 살던 터에는 현재 팔효사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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