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모(鄭秉謀)

  • 관리자
  • 2019.01.08
  • 1919
독립 운동가
정 병 모(鄭 秉 謀)(1872.10.18 ∼ 1945. 3.10)
 
전라북도 김제 청하 출신으로 1919년 4월 3∼4일에 걸쳐서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4월 3일 저녁때 신경식(申耕植), 고용석(高龍錫), 유상순(柳相淳), 유상설(柳相卨) 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그 지방의 고유 풍속인 화전회(范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박승화(朴承花)의 집 앞 냇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담을 나누고 있을 때, 고용석과 유상설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많은 약소국가의 독립이 승인되고 조선도 독립을 승인받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즉석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자 모두가 찬성함에 스스로 대한독립기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선두에 세우고 2백여 명이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모현리 일대를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은 점점 많아져서 3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거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들이 고용석, 유상설, 유상학, 신진식을 주동자로 연행하여 이날밤 신경식, 신태식, 신상우 등과 다시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

이튿날 오전 11시경 그는 오상구(吳相九), 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시위행진하게 하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전날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헌병주재소에서는 장성읍 헌병분대를 불러들여 무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고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

그는 그 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1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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