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鄭湛)

  • 관리자
  • 2019.01.08
  • 2166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충신 정 담(鄭 湛)(1540년 ∼ 1592년)
 
* : 언결 또는 징경(澄卿)
* 호 : 일헌(逸軒
)
* 출생지: 강원도 평해부 사동리 (지금의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

공은 천성이 총명하고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공이 8세 때의 일이다. 이미 주사(周史)를 읽던 공은 난왕이 진왕(秦王)에게 돈수수죄(頓首受罪)하는 대목을 보고는 '난왕은 신하가 없을까? 어찌 친히 죄를 받았을까?' 하는 의문을 나타내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뿐만 아니라 공의 나이 12∼13세 때는 중국의 고전인 시경(誇經)을 척척 읽어내는 등 언어와 행동이 남다르게 뛰어났다
.

이처럼 학문이 깊었던 공은 18세 때 향시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향시의 외선운위(嵬選畿違)에 분개한 공은 『대장부가 활과 말로 뜻을 이루어야지 어찌 문자(文字)에만 얽매이어 백수서생(白首書生) 노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그 날로 병서(兵書)를 가까이 하는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 공의 무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다
.

온갖 무술을 몸에 익힌 공은 1583년(선조(宣祖) 16년) 12월 무과(武科)병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회령(會寧) 도호부 판관(都護府 判官)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어서 경원 도호부 판관(慶源 都護府判官)을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와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掠府 都司)를 역임한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宣祖 25년) 4월에 김제군수로 도임 하였다
.

공은 경원판관시에 북병사 신립 장군 막하에서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당하였는데, 돌격장(突擊將)으로 경원 율포리에서 적장 니탕개를 사살하여 수임(首任) 무관(武官)이 되었다. 경원 도호부 판관시에 이호지란(尼湖之亂)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효제 충신의 도리를 다하며 이 지방에 처음으로 수도작(水稻作)을 가르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어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擺府 都司)로 전임되었는데, 떠날 때에는 군민이 길을 막고 못 떠나게 하여 후문으로 나와 임지에 도임 하였다 한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태와 급함을 짐작한 공은 홀로 부임하여 군사를 정비한 후 조방장(助防將) 이봉(李奉)과 함께 곰티재(熊峙)로 나아가 진을 쳤다. 순찰사 이광(李沇)이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용인(龍仁)까지 갔을 때 당시 방어사(防禦使) 곽영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했던 공은 이미 용인에서 패한 쓰라림을 맛본 뒤라 더욱 비분강개(悲憤慷慨)한 마음을 품고 오직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킬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

때는 1592년 6월 하순, 공은 방어사 곽영으로부터 적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1만 5천 명의 대군을 금산(錦山)에서 둘로 나누어 일진은 이현(梨峴)을 넘어서 전주로, 또 일진은 진안(鎭安)을 거쳐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 입성을 꾀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공은 즉시 붓을 들어 유언과 같은 편지를 아들에게 썼다
.

『나는 죽음으로써 국은(國恩)을 보답할 것이니 나의 갑옷 속에 이름을 써 놓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라와 임금을 위함이니 내가 죽은 후에 이 아비의 시체를 찾아가거라.』


그리고나서 부하 장수와 군졸을 모아 놓고 소리쳤다.『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하고자 하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어느 한 사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공의 애국충절에 감동한 것이었다. 이에 공은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수와 군졸을 배불리 먹이고 싸움터로 향하였다.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1592년 7월 7일 적장 조소천은 수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진 이복남은 곰티재 입구인 진안쪽 개울을 지키고, 2진인 황박은 산중턱을 지키고, 공이 맡은 3진은 산꼭대기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여 1진 이복남은 40리 밖 안덕원으로 후퇴하고, 2진 마저 함락되니, 3진을 맡은 공은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수 밖에 없었다
.

이 전투에서 공은 백마를 타고서 쳐들어오는 왜적의 장수를 큰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 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왜적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

그러나 곧바로 전세를 가다듬은 왜적은 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실로 바람 앞이 등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조방장 이봉이 나서서 아뢰었다.『장군, 후일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만 진을 거둡시다.』
 그러자 공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이신허국(以身許國)을 모르느냐? 이 자리에서 죽기는 쉬우나 한치의 땅도 적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차라리 왜놈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발을 더 물러서서 살 수 는 없다. (奉如叢一賊而死. 不可退-步而生)』 그리고는 화살이 다하도록 싸운 다음 다시 칼을 빼어 닥치는 대로 왜적을 베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성난 사자가 싸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왜적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날이 1592년 7월 8일이었다.
공의 충의(忠義)에 감격한 왜적은 조각난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조 조선국민 충간의담(濕 朝鮮國民忠肝義膽』이라는 푯말을 세웠다고 하며, 전주, 김제 읍민이 전주복문(全州北門)에 반장(反葬)하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3백여 년이 지나 충신의 육체는 백골이 되었어도 충혼 의백(忠魂 義晩)은 살아 있는 것일까. 1910년 한일합방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정려각(旅閭閣)의 비석이 스스로 소리내어 울렸고, 비석 표면에 3일간 물이 흘렀는데 인근 주민들은 함한(含恨)의 눈물이라고 하여 충신의 의(義)에 더욱 감격 하였다는 것이다
.

조정에서는 1593년(선조 26년) 9월에 병조참판직을 추증하고 명정하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