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李鍾熙)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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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 립군
이 종 희(李鍾熙) (1890년 ∼ 1946년)
 
선생은 김제군 금산면 용호리 663번지에서 1890년 4월 19일에 출생하였다.

이름은 집중(集中), 인홍(仁洪)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선생이 유년시절과 소년시절 그리고 청년시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아직까지 구명된 바가 없다. 다만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어디에선가 교사로 봉직하면서 후세들에게 민족의 얼과 독립정신을 고찰케 하고 있었으며, 전주(全州)의 유두환으로부터 백원을, 박모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마련하여 떠났다는 것 밖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독립운동사 제7권 한국독립운동사, 임정 의정원 문서 등에는 선생의 항일투쟁 기록이 보인다. 선생은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항일투쟁에 헌신하였다. 1922년 3월에 김익상(金益狀), 오성륜(吳成崙) 등 단원과 함께 상해 황포탄(黃浦灘)에서 일본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여 두 단원은 붙들렸지만, 선생은 단신 도피하는데 성공하였다
.

1925년에 중국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고 그 뒤 바로 상해, 남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군하였으며, 1927년에 남경에서는 중국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

1932년에는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上尉連長)으로 복무하면서 남경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1936년 2일에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제 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

그 뒤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 집행위원과 조선의용대 총무조장을 역임하면서 김약산(金若山), 박효삼(朴孝三), 이익성(利益星), 김세일(金世日) 등과 함께 조선혁명 청년들에게 정확한 전투적 정치신기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찾아 1946년 3월 중경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조국을 목전에 두고 선생은 불행하게도 배안에서 그만 득병하였다
.
송 부인의 정성어린 간호도 보람없이 한 많은 일생을 꽃피우지 못하고 그리던 조국땅을 밟지도 못한 채 여섯살난 어린 아들과 아내를 남겨놓고 3월 28일 배안에서 고혼이 되고 말았다
.
유해는 고향인 원평으로 운구되어 원평 뒷산에 묘소가 있을 뿐이다
.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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