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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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와 패자

원산에서 지하노동운동을 하던 최현옥은 원산 경찰서 형사계장 양치성에게 갖은 고문과 함께 성 고문을 당하고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어진 최현옥은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하여 비밀을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양치성은 그간의 공적으로는 벌써 경찰서장이 되었어야 하나 조선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경찰서장이 되질 못한다.

두 여자

지요꼬는 전동걸에게 조직원이 아니 남자로서 애정을 느끼며 이미화에게 그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미화는 전동걸의 생일을 맞아 책과 함께 빨간 장미를 수놓은 하얀손수건을 선물한다.

인간 사냥

일본 징용부대인 노무보국회에서 사냥식 마구잡이로 징용자를 끌어들인다. 그와 같은 마구잡이식 징용자 색출에 차득보 및 정상규의 큰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죽자 만석꾼이 된 정방현 등 3백명이 붙잡힌다. 그러나 그들 중 정방현 혼자만이 풀려난다. 그는 고액납세자였고 전쟁후원금을 내는 후원자였던 것이다.

정복되지 않은 혼

대동아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자 징병자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천인침이 유행한다. 1944년부터 시행하려던 징병제가 전쟁의 확대와 계속되는 전사로 병력이 모자라게 되자 1943년 8월부터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죄명도 형기도 없는 죄수로 전주형무소에 수감중인 송중원은 큰아들 송준혁에게서 어엿한 성인의 모습과 함께 대견함을 느낀다. 자신이 허탁과 함께 고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아들이 고학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잊으리라 생각한다. 전동걸은 어머니 홍씨의 부탁으로 금예의 아들에게 배제일이라 작명해 주자 기뻐하는 어머님의 모습뒤에 감추어진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하계 방학을 마치고 이미화와 함께 동경에 간다. 사혁회에서 학병을 피해 탈출하자는 의결이 이루어지고 전동걸은 지요꼬와 함께 만주 조선의용군을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떠나기전 이미화와 밤을 보내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며 헤어진다.

학병의 파장

총독부에서는 대학,고등학교까지 일제히 징집영장을 발급하며,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 징용키로 결정했다. 학도지원병이란 지원은 허울좋은 장식일 뿐이었다. 정도규, 유승현은 점조직을 통해 학도병 대상자를 지리산으로 피신시킨다. 학도병으로 통고받은 송준혁은 운봉의 도움으로 자살하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로 가장하여 지리산으로 피신한다. 한편 박용하는 학병 입영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그대로 교사 생활을 했더라면 어머니가 괄시당하고 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고 자신도 사지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지만 입영날짜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모친 반월댁은 큰며느리로부터 구박 받으며 천인침을 뜨러 다닌다

종군위안부들의 행로

복실이와 순임이는 종군위안부 모집인의 꾀임에 속아 위안부로 팔려나간다. 남자들이 다 군대에 나갔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며 매달 30원씩 노임을 준다며 꾀였던 것이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중간에 머무른 부산 수용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예닐곱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공장에 간다는 말이 앞뒤가 안맞음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들은 오사카와 시모노세끼로 끌려가 하루에 5-10차례 군인들을 맞이해야 했고, 복실이는 사이공을 지나 랑군으로 끌려갔다.

해바라기 군상

민동환,홍명준,박정애 등이 친일로 돌아선다. 홍명준은 일본인과 사돈을 맺으며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 지부의 간부가 된다. 민동환은 내선일체 정책에 호응했다는 이유로 국민총력연맹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감격스러워 한다.

당신은 아는가

홍씨는 공허스님의 뜻이라 생각하며 보름이와 그녀의 딸 금예를 거두어 집을 마련해 준다. 모녀를 거둔다고 해서 아들 동걸이를 가르치는데는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이다. 동걸이는 공허가 지어준 이름으로 그의 성씨를 묻지 않고 가고 없는 남편의 성을 붙여 전씨가 되었다. 홍씨는 창씨개명으로 고심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그 자식들은 학교에 입학을 금지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동걸이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혼자 걱정하는 그녀에게 아들 동걸이는 전(田)자 앞에 큰 대(大)자 하나만 놓으면 된다며 통쾌하게 웃는다. 웃음소리며 웃는 모습에서 홍씨는 공허스님의 환생을 보고 있었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되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사할린 탄광촌에 끌려간 김장섭 등 조선인 징용자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하루에 12시간 이상의 채탄작업을 해야 했다. 탄광의 밥도 쌀은 찾아볼 수 없는 잡곡밥이거나 콩밥이었으며 국은 묽게 푼 다시마 국이었고 단무지 한쪽은 나오다 말다 제멋대로였다. 막노동에 못이겨 김장섭의 막사 노무자 2명이 도주하지만 곧 잡혀온다. 십장이 갖은 폭행을 하며 동료 노무자들에게 구타를 강요한다. 총독부에서 각지의 성당을 군대용으로 강압접수하고 신부와 신학생들을 노무자나 군인으로 끌어가게 되자 노무자로 끌려온 대전성당의 신부였던 심기헌이 항의하며 차라리 자신이 대신 맞겠다고 한다. 도망했던 노무자를 대신하여 구타 당한 그는 독 감방에 갇힌지 사흘만에 풀려 나게 되나 사망하게 된다

거짓말의 현장

학도병으로 징병된 박용하는 미얀마전투에 투입된다. 연합군의 폭격에 맥을 못쓰는 일본군을 보고 무적의 황군은 거짓말이며 일본은 형편없이 지고 있음을 깨닫고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위안소에서 복실이를 만난 그는 가슴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끼며 최초로 피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걸어서 반만리

지요꼬와 부부로 행세하며 경찰들의 검문을 피해 태항산록의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전동걸은 3개월간의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마치고 전투요원이 되며 지요꼬는 선전부에 배치된다. 지요꼬의 합류로 조선의용군에 일본여자가 둘이 되었다. 한 대원은 초창기부터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음모, 음모

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갔으나 중일전쟁이 터진 1938년 일반처녀들 1백여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개설하면서 일본군은 낭인패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 “여접원을 하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 는 등의 거짓말로 사기극을 벌이며 처녀들을 군용위안부로 끌어 갔다. 그러다가 1941년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직접 나서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여자사냥을 시작하고 정신대 문제로 민심의 동요가 심각해진다. 일본은 가급적 도회지와 중류층 이상은 피하면서 비밀리에 실시하여 민심의 동요를 최대한 막으라는 지시를 각 도청에 하고, 이런 연락을 받은 하시모토는 변두리 지역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정신대의 대상이 되는 딸을 가진 집들을 사오십가구 조사하라고 총무과장에게 지시한다. 상점에서 도둑질 한자 등을 협박하여 그의 딸들을 정신대로 끌어갔다

패전의 길

파라오에 위안부로 끌려간 순임이는 연합군의 계속되는 폭격으로 산으로 피신한다. 순임이네 일행은 열셋에서 다섯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도마뱀과 쥐도 잡아 먹었다. 열사흘째 되는 날 순임이는 폭격을 당해 죽는다. 연합군이 상륙하자 많은 학도병들이 영국군으로 탈주한다.

아이누족의 온정

차득보네가 징용으로 투입된 곳은 북해도의 도로공사장이었다. 도주하다 붙잡힌 두 명의 노무자는 감독의 강압에 의해 다른 노무자들이 던지는 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는다. 각목으로 급조된 십자가에 매달린 그들은 까마귀의 밥이 되어 사람의 형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로지 공사가 끝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도로공사가 끝마무리되면서 노무자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옮겨갈 곳이 탄광이라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절대로 탄광까지 끌려가지 않을 작정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저녁 공사장을 탈출한다. 그리고 아이누족 마을로 도주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조선인 강상호를 만나 피신하게 된다.

신세벽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온 학생들을 화전민들의 거처를 따라 10명을 단위조직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실시하고 있는 것은 사상학습이었다. 학습하고 토론하는 날들이 쌓이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여 가고 있었다. 피아골의 송준혁이 그런 전형적인 예였다. 그들의 생활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고 지도하는 총책은 이현상이었다. 한편 평양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학도병들이 훈련소를 탈출하여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 발각되어 70여명이 검거되는 평양사단 사건이 발생했다. 소작인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엄청나게 끌어갔기 때문에 1944년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놀리는 논이 50여정보로 집계 되었다. 일제는 부족한 전쟁물자의 보충을 위해 식량영단을 통해 무제한 공출을 실시한다.

허깨비 군대

사진관을 운영하며 관동군에 대한 정보수집을 하던 소련 첩보원 윤철훈은 발각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고 부인 차은심과 아이들은 하얼빈으로 도주한다. 그는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하고 인체실험장으로 끌려간다.

해방 그리고 비극

지삼출의 아들 지만복은 마흔하나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징병으로 끌려간다. 그동안 만주의 조선사람은 선만일여의 정책에 따라 일본이 좋은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송화강 건너 하얼빈 외곽지역에 있는 훈련소로 끌려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며 어린 자식들 때문에 개죽음을 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소련군이 8월 8일을 기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소만국경의 관동군들은 그 어느 부대나 이들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지만복은 중대원들과 함께 아무르강(흑룡강)을 건너 소련땅을 밟으며 집들이 있는 동쪽하늘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그러나 높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 부락에서는 뜻밖의 외침에 놀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왜놈덜이 다 없어졌다! 왜놈덜이 다 도망갔다아!"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무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일본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주 경찰들도 없었다. "우리도 얼렁 고향 찾아 가자아!"누군가가 힘차게 외쳐댔다. 이튿날 아침에 남자들은 자식이 군대에 끌려간 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했다. 결국 다같이 떠나기로 했다. 1백가구 6백여명의 행렬이 한 20리쯤 걸었을 즈음이었다. 저 왼쪽에서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외치며 손에는 연장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그건 중국 말들이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여러 가지 연장이었다. 「다들 짐 내려! 우리가 저놈덜을 맡을 것 잉게, 여자덜언 새끼덜 델꼬 저짝으로 내빼!」나이 제일 많은 남자가 서쪽을 가리켰다. 중국사람들이 100여 미터도 못되게 가까워져 있었다.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끝없는 광야 저쪽에 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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