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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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자연환경과 역사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하와이는 북태평양의 동쪽에 있는 하와이제도로 구성된다. 하와이제도는 니하우·카우아이·오아후·몰로카이·라나이·마우이·카호올라웨·하와이 등 8개 섬과 100개가 넘는 작은 섬들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600km에 걸쳐 있다.

하와이 전역의 기후는 열대에 속한다. 각 섬의 북동 사면은 고온다습하여 열대성 우림을 이루고 있고, 바람의 그늘이 되는 남서쪽 사면은 강수량이 적은 사바나 기후를 이루어 건조성의 식물이 자란다.

또 산이 높은 하와이섬의 남서사면에는 넓은 건조지역이 펼쳐져 미국 서부에서와 같은 대규모 방목지가 펼쳐졌다.독립국가였던 하와이는 미국과 극동을 잇는 태평양상의 통상·포경(捕鯨) 기류지가 되면서 미국인을 중심으로 외국인 거류자들이 늘었다. 1840년대에 영국·프랑스 및 현지 미국인과의 사이에 그 귀속권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으나 결국 독립이 유지되었으며, 1887년에는 미국과의 호혜통상조약에 의해 진주만의 미국 해군기지 사용권을 인정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급증하는 노동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아시아인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1890년의 미국 관세법(關稅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게 되자 미국과의 합병론이 대두하여 1897년에 합병조약이 체결되어 다음해에 미국의 주권하에 놓이게 되었고, 1900년에 미국의 준주(準州)가 되었다. 미국령(領)이 된 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의 재배가 한층 촉진되어 외국인 노동인구도 증가했다.

빚에 팔려간 노예이민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외국인 노동자 유치를 위해 ‘계약노동’을 합법화 시켰다. 일반적으로 속임수나 강제적 성격을 띤 이 ‘계약노동’은 계약기간 동안 노동자들을 완전히 예속상태에 두고 마음대로 부렸다.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초대 주한 미국공사 알렌(horace allen)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가 알렌에게 한인노동자의 하와이 유치를 요청하자, 알렌은 고종을 설득, 이를 승인하게 하였다.

이어 고종의 허가를 얻어낸 알렌은 한인 이민자 모집 업무는 미국인 데쉴러(david w. deshler)에게 맡겼다. 그리고 1902년 대한제국 궁내부 산하에 설치된 이민전담 기구인 수민원(綏民院)에서 여권 발급업무를 시작하였다. 고종으로부터 한인들의 해외이주의 전권을 위임받은 데쉴러는 동서개발회사와 데시라(데쉴러)은행을 설립하고, 이민자 모집과 파송 업무를 대행했다. 미국 이민공고에는 일년내내 날씨가 따뜻해 생활하기 좋고, 매월 지급되는 노임이 16달러는 원화 64원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소득이라는 선전이 실렸다.

동포들의 피로 물든 핏빛 땅, 그 위에 자란 푸른 사탕 수수

미리견(彌利堅: 미국)의 포와도(布蛙島: 하와이)에는 돈나무가 있다더라.’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뙤약볕과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이 자라 있는 사탕수수와 난생 처음 본 야자수들이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사탕수수 잎에 손이며 발, 얼굴 등을 베이면서도 초기 이민자들은 끈질기게 뿌리내렸다.
작가 조정래는 아리랑 취재차 방문한 하와이에서 하와이의 핏빛 흙은 채찍질 당한 동포들의 피가 물든 것이고, 사탕수수들은 그 진액을 빨아 저리 푸른 것이라고 했다.
"천국인 줄 알고 돈벌러 온 모양이구려. 생각 바꾸시오. 여긴 생지옥이고, 우린 흰둥이 미국놈들 종으로 팔려온 거요. …" < 아리랑> 1 초기 이민자들은 커다란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했으며,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부터 작업을 시작해 하루 10시간을 일했다. 감독의 감시 아래 한줄로 늘어서 작업을 하고 끊임없이 감시당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다거나 딴전을 피운다는 이유로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했다.
힘든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은 또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초기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미혼 남성들이었는데 이들은 혼기를 훌쩍 넘기고도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해 총각들의 결혼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결혼을 희망하는 한인 이주자들은 자신의 사진을 고향에 신붓감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이민국과 사탕수수재배회사뿐 아니라 한인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와 교회에서도 사진결혼을 적극 권장했다. 이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한인 여성들을 사진을 동봉해 답장을 띄웠다. 이렇게 성사가 되면 신랑측은 신부의 모든 경비를 부담해 미주로 건너오게 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한 신부들이 신랑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는데 남자들이 대부분 10년 이상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냈기 때문이다. 또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의 사진을 대신 보낸 경우도 있었다. 사진 한 장만 믿고 태평양을 건너온 신부들은 신랑이라고 나타난 중년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국에 오기까지 경제적 지원이 있었을 뿐 아니라, 더 넓은 세상에서 신교육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이던 이내수(38세)와 결혼한 최사라(23세)가 사진신부 제1호였다.
1910년부터 ‘동양인배척법’이 통과되어 이민이 금지된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온 십대 처녀들이 1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건너온 이후 하와이 이민사회는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여성들은 낮에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또 부업을 하는 등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식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 항일여성단체를 꾸려 독립기금을 마련하는 등 남성들 못지않게 독립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dole 파인애플 농장

우리에게 친숙한 파인애플 상표인 "dole"은 제임스 돌(james dole)이라는 파인애플 농장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사람에 의해 파인애플이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 공급되었다. 하와이 관광코스로도 유명한 돌 파인애플 농장에는 농장설립자이자, "dole"이라는 세계적 브랜드를 키운 제임스 돌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이 농장이 한인들의 땀과 피로 가꾸어진 곳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파인애플은 한 번 수확하는 데 1년이 넘게 걸리며 겉껍질이 칼과 같이 날카롭고 두꺼워 손이며 얼굴이 찔려 성할 날이 없어도 일일이 손노동이 필요한 작물이다. 돌은 대규모 파인애플 재배를 위해 일 잘하는 한인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구했다. 파인애플 농장은 소출량에 따라 임금을 조정하여 지불하는 방식의 일종의 소작제로 한인들을 고용했다. 부지런하고 알뜰하고 절약하는 한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오늘날 돌 파인애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와이에 울려퍼진 독립국가

초기 이민사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이들이 애써 마련한 독립운동기금은 임시정부와 국내외 항일의거의 바탕이 되었다. 1909년 2월 1일 설립된 국민회에 세금과 같은 의무금을 내야 서로 국민 대접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미주에서 임시정부의 재원 조달을 담당하도록 한 결과, 하와이 교민사회가 임시정부 재정의 3분의 2를 조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장정은 일급 65센트, 여성과 아동은 50센트를 받았으니 한달 겨우 15달러밖에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하와이 교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 독립운동에 헌납한 액수는 무려 200만 달러나 되었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사살을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협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가 통합해 1909년 2월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이듬해 대동보국회를 흡수하여 조직된 대한인국민회는 북아메리카,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지방총회를, 멕시코 등에는 지방회를 두어 국외 한인사회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발전했다. 이 단체 명의로 미주 한인들은 ‘국민의무금’을 모금해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미국정부와의 직접 교섭권을 인정받기도 했다.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뿐 아니라,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독립전쟁에 대비한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들어 훈련시켰다. 박용만은 이승만의 외교적 독립노선과 달리 독립군을 통합해 무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와이 오아후섬 가할루지방 파인애플 농장에 병영지와 군사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학생들은 낮에는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제복을 입고 정식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향수를 달랜 샌달우드

1903년 1월 13일 이후 1905년 4월말까지 한반도에서 총 7,843명의 이민자가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하와이 첫 이민선이 떠난 지 1년 6개월 만인 1905년 4월 1일자로 해외이민금지법을 선포했다. 그 배경에는 미국에서 고조되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반일감정이 있다. 1903년 시작된 한인들의 하와이 유입으로 일본인 노동력의 임금이 삭감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인들이 본토로 이주해 가자, 백인농민 및 노동자들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더욱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미국에서 불고 있는 반일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인들의 해외이민금지를 종용했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중단시켰다.

그나마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사진 속 남자와 결혼을 위해 건너온 1,000여 명의 사진신부들은 하와이 이민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가정을 꾸리고, 사탕수수 농장을 벗어나 자립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한인들의 삶을 한층 안정화 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자기 가족의 안위를 넘어 조국의 독립을 되찾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갈 곳 없는, 나라 잃은 자들의 서러움을 달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소설 아리랑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이 궂은 일이나 경사스런 날에 찾는 샌달우드가 조선인들의 한을 달래고 복을 기원하는 고향의 당산나무였다고 적고 있다. 고향의 짙푸른 소나무만은 못해도, 하와이 낯선 이국땅의 샌달우드는 고향 어귀 넉넉한 품의 당산나무가 되어 한인들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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